부모님 인사
안경을 벗고 렌즈를 낀다. -6.5의 두꺼운 안경알을 벗으니 눈이 몰라보게 커진다. 한 듯 안 한 듯 톤업크림을 얇게 펴바르고, 옅은 색조가 껴있는 립밤을 칠한다. 그리고 다시, 도수없는 안경을 낀다. 어지간해서는 잘 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오늘은 예외다. 예뻐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두둘이네 부모님을 처음 뵙는 날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을 뵙기로 하고 나서, 두둘이는 꽤 많은 시간을 인터넷 검색에 쏟았다. 좋은 선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두팔 : 아니 뭘 그렇게 찾아요. 그냥 우리 엄마 아빠 한번 보는 건데. 뭐 들고갈 필요가 없다니까?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공을 들이는 두둘을 보며, 약간의 답답함이 있었다.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얼굴 한번 볼 뿐인데.
두둘 : 오빠, 그러면 오빠는 우리 엄마 아빠 볼 때 뭐 안 들고 갈 거에요?
두팔 : 아니 그건 또 다르죠. 들고 가야지.
두둘 : 거봐,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아들 입장이랑 며느리 입장은 또 다르다고요. 며느리한테는 무려 시부모님이라고요 시부모님!
입장을 바꿔보니 그제서야 공감이 됐다. 30년을 넘게 봐와서 내게는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두둘이는 잔뜩 긴장이 되겠구나. 게다가 호칭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무려 며느리 입장인데. 사위가 장인어른 장모님 되실 분들을 뵙는 것보다 더 떨리겠구나 싶었다. 내가 생각이 이렇게 짧다.
결국 우리는 선물에 힘을 좀 주기로 했다. 처음 인사 올리는 자리니까, 이번만 그러기로 했다. 다음에는 더 편하게 가더라도, 처음은 두 손 무겁게 가기로. 그래서 정해진 선물은 과일 한 바구니, 고기 한 상자, 그리고 꽃 한 다발이다.
처가 근처 일식집. 약속된 시간보다 15분 여 일찍 도착한다. 과일과 고기와 꽃과 함께였다.
어떤 분들일까 궁금하기 보다는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전날까지는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었는데, 당일이 되고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그 때부터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우리는 방에 선물을 갖다놓고 식당 입구에 나와 기다렸다.
두둘 : 도착했대요. 어, 저기 오는 거 같은데? 아빠!
얼마 지나지 않아 두둘이네 식구들이 도착했다. 마찬가지로 아직 약속시간이 다 되지 않았을 때. 혹여나 늦을까봐 여유있게 나오신 듯 했다.
두팔 :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두팔이라고 합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되실 분들께 처음 드리는 인사. 꿉벅 폴더인사를 드렸다.
아버님 : 어어, 그래 그래. 반가워요.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지.
손을 내밀며 악수로 반가이 반겨주시는 아버님. 이어서 어머님도 두 팔 벌려 맞아주셨다.
어머님 : 어머 어머, 잘 생겼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대. 일단 얼른 들어갈까?
두둘이 동생들과도 눈짓으로 인사를 한 뒤, 우리는 우르르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그제서야 두둘이네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양복에 넥타이까지 하셨고, 어머님도 한껏 화사하게 꾸미셨다. 처제도 처남도 예의를 가득 차린 옷차림. 내가 뭐라고 저렇게 입고들 나와 주셨을까 싶었다.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렇게 신경을 써주신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버님 : 자, 어여들 먹자.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 첫 만남이었으니 약간의 어색함은 서려있었지만 분위기는 충분히 좋았다. 대화가 잘 이어지도록 아버님께서는 이런 저런 얘깃거리들을 던지셨고, 어머님께서는 소리내어 웃으시며 사운드를 채워주셨다. 두 분께 질새라, 나 역시 열심히 말을 보태며 분위기를 맞추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폭풍전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땅히 나와야 할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결혼식 얘기였다.
걱정이 많았다. 내가 잘 보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노웨딩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면 될까에 대한 우려였다. 결혼식을 하는 게 어떻냐는 얘기를 분명히 하실 거 같은데, 이걸 어떻게 설득하면 될까. 자칫 고집 세고 무례해보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만에 하나라도, 반드시 결혼식을 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말씀하시면 어떡하지. 난 어떻게 얘기를 하면 될까. 마땅한 대응이 생각나지 않았다.
드디어 어머님이 얘기를 꺼내셨다. 올 것이 왔다.
어머님 : 근데 두둘이 얘기를 들어보니까, 응, 결혼식은 따로 안 하기로 했다고.
두팔 : 예, 맞습니다. 두둘이랑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대답을 듣자 약간 굳어지는 어머님의 표정. 이거 내가 실수를 했나. 지나치게 단호하게 말했나.
아버님 : 아니 근데 나는 너무 좋더라고.
결례를 범한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던 차. 이어지는 아버님의 말씀은 나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버님 : 자기의 소신과 철학이잖아 이게.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뭔가를 딱 추진한다는 게 아주 괜찮더라고.
아버님의 말씀에 어머님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알고 보니, 이 자리에 나오며 걱정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두둘이네 부모님도 많은 걱정을 하며 나오셨다고 했다.
아버님 : 나는 걱정을 많이 했었어. 그런데 이렇게 실제로 만나보니까 사람이 정말 좋으네.
두팔 :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그런데 아버님이야말로 인상이 너무 좋으신데요. 어머님도 그렇고, 동생들도 그렇고요.
허허. 아버님이 웃으며 말을 이으셨다.
아버님 : 아니 진짜로 걱정을 많이 했었다고. 우리 두둘이가 애는 선하고 착하지만서도, 집을 너무 좋아해서 밖에를 잘 돌아다니지도 않았다고 얘가.
두팔 : 네, 그렇잖아도 집 좋아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자기는 집순이라고요.
아버님 : 아니 그러니까, 혹시나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닌가 싶었다고. 사람을 많이 안 만나봐서 사람보는 눈은 있나 했지.
그리고는 말을 몇 번 고치시더니,
아버님 : 혹시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사람을 만나나 했어.
딸을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 충분히 하셨을 만한 걱정이었다. 혹시나 내 사위가 사회성이 좀 떨어지나, 친구가 없나, 왕따인가, 소시오패스인가, 히키코모리인가. 그런 사람이랑 딸이 결혼하겠다고 한 거면 어떡하나. 식을 안 올리고 부부가 되겠다는 얘기를 들은 부모 입장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할 수 있는 걱정이다.
두팔 : 아하, 뭐 결혼식도 안한다고 하니까요.
아버님 : 그렇지. 우스갯소리지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 한 사람인가, 부를 친구가 없나 싶었다고.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니 그게 전혀 아니네. 말도 잘하고 사람이 너무 좋아.
아버님은 진심으로 안심하신 것 같았다. 아버님의 걱정을 내가 잘 지워드렸구나 싶었고, 아직까지 내가 큰 실수를 한 건 없구나 싶기도 했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버님 : 허례허식을 안 하겠다, 딱 그런 거잖아? 자기 소신이 있고 철학이 있는 거 같어.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도 있는 거 같고. 이게 정말 훌륭한 거지. 이제 우리 두둘이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칭찬폭격. 어쩌면 내가 어머님 아버님 마음에 조금은 들었나.
어머님 : 진짜 그렇다니까요. 우리 두둘이가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대.
한 편으로는 부끄러운 듯이, 하지만 동시에 으시대듯이 두둘은 웃었다.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미리 했던 걱정은 기우가 됐다. 위기상황은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님 : 얘가 얘기를 하더라고. 결혼을 하는데 결혼식을 안 한다고.
두팔 : 예, 그러니까요.
아버님 : 얘가 어지간해서는 본인 생각을 잘 말 안 하는데, 예전부터 자기 고집은 또 있어. 그래서 한 번 딱 이건 이거다 하면 나나 얘 엄마가 뭐라고 해도 자기가 말한대로 하더라고.
두팔 : 아, 두둘이가 자기 고집이 또 있나봐요.
아버님 : 얘가 저기 뭐야 대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한 학기를 딱 다니더니 자기는 대학을 다시 가야겠다는 거야. 그러더니 2학기 등록도 안 하고 수능 공부를 하더라고. 우리는 막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등록은 해놔라 했는데, 어차피 안 다닐 거 돈이 아깝다는 거야.
두팔 : 그러게요. 보통 혹시 모르니까, 보험 삼아서라도 등록은 해 놓을 텐데.
아버님 : 그렇지. 보험 삼아서 해놓으라는 건데 그것도 안 하고. 결국 수능 다시 봐서 대학 다시 들어갔잖어.
두둘의 과거 얘기를 들으며, 어쩌면 두둘이가 긴 세월동안 두텁게 고집을 쌓아놓았던 덕분에 우리의 결혼이 큰 위기 없이 설득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 그래서 얘가 결혼 얘기 했을 때, 다 알았다고 했지. 오늘 보니까 정말 안심이네.
얘기를 듣고 계시던 어머님이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거드셨다.
어머님 : 그리고 우리는 애가 셋이잖어. 어차피 얘한테서 못 해도, 둘째 셋째 결혼할 때 거두면 되니까 전혀 걱정하지 말어.
약간이라도 생길 마음의 빚까지 멋지게 지워주시는 어머님. 감동적인 배려에 맘 속 깊이 탄복했다.
요즘 처제는 결혼 준비에 한창이다. 언니와는 달리 웨딩홀 답사에 스드메 투어에 정신 없이 바쁜 것 같다.
두삼 : 언니만 아니었어도 저도 언니처럼 했을 텐데. 이미 언니가 그렇게 해버려서 저는 선택권이 없어요.
처제는 나에게 얘기하듯 언니에게 애교 섞인 질투를 부린다. 그래도 언니가 결혼하는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두둘 : 그러게 먼저 하지 그랬어.
아쉬워하는 처제를 앞에 두고, 두둘은 익살스럽게 웃는다. 마치 자신이 승리자인 양 말이다.
BEHIND : 두둘의 이야기
두팔이가 저희 부모님 만났던 얘기를 했으니, 저는 시부모님 만났던 얘기를 해야겠네요. 당시엔 시부모님이 아니라 예비 시부모님이었지만요.
첫 인사를 드렸던 곳은 유명한 중식당이었어요. TV에 많이 나오는 셰프가 하는 식당이라 평소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예약이 어려워서 못 갔던 곳이에요. 그런데 제가 거기를 가고 싶다 했던 걸 두팔이가 예비 시부모님께 말씀 드렸었지 뭐에요. 그래서 어머님이 거길 예약해주신 거에요. 처음 만나는 자린데 새아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봐야한다 하셨다더라고요. 정말 감사했고, 또 황송했어요. (계산도 시부모님이 해주셨어요. 저희가 하겠다고 했는데 끝내 저희가 지고 말았습니다.)
황송했던 게 또 있네요. 잔뜩 얼어붙어 있는 저한테 갑자기 선물을 주시더라고요. 앞으로 둘이서 여행을 많이 다니라면서 명품 여권지갑을 말이죠. 예상을 아예 못 했던 일이라 더 기억에 남네요. 바로 전 날, 두팔이가 저희 부모님 만날 때는 아무것도 준 게 없어서 괜히 마음이 쓰이기도 했어요. 저희 부모님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아시고는 발을 동동 구르셨답니다. 우리도 해줬어야 했는데 못 챙긴 거 아니냐면서요.
(참, 저희는 제 부모님을 먼저 만나고, 다음날 이어서 두팔이네 부모님을 뵈었어요. 점심-저녁으로 해서 하루에 다 볼까도 했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이틀에 나눠 했어요. 이건 취향 차이니까 어떻게 해도 큰 상관은 없는 것 같아요.)
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안 좋은 말씀을 전혀 안 하셨어요. 두팔이랑 같은 생각이냐고 여쭤보신 거랑 저희 집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고 말씀하신 게 전부에요. 그래서 노웨딩에 대해 걱정을 하고 계셨다는 걸 조금도 눈치 못 챘네요. 솔직히 이런 건 두팔이가 저한테 공유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시부모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해보면 제가 긴장했던 사실이라거나 무얼 어떻게 말씀드렸는지에 대한 내용들보다는 음식이 더 기억에 남아요. 맛도 맛이었지만 양이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엄청나게 많이 시키시더라고요. 우리집이었다면 두 세 끼는 먹고도 남았을 양이었어요. 물론 음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건, 그만큼 어머님 아버님이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분위기를 풀려고 스몰토크를 계속 해주셨기 때문이지만요.
요즘도 종종 시부모님과 외식을 하곤 하는데요, 언제나 메뉴를 정말 많이 주문하세요. 양껏 먹을 수 있어서 저는 좋아요. 한 가지 아쉬운 건, 그 날 그 중식당에서는 별로 못 먹었다는 거에요. 깜짝 놀랄 정도로 음식을 많이 시켜주시긴 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와구와구 못 먹고 맛만 조금씩 봤거든요. 지금도 생각나네요. 멘보샤!!! 배추찜!!!!! 긴장한 제 입에도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배추찜을 좋아한다는 건 그 날 처음 알았어요. 아직도 가끔 두팔이에게 거기 다시 가자고 얘기하고 있답니다. 이번에 가면 진짜 제대로 먹을 거에요. 기다려라 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