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틈날 때마다 아빠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갖다 대곤 했다. 아빠의 크고 따뜻한 손바닥엔 굵은 손가락들이 쭉쭉 뻗어 있었고 끄트머리에는 큼지막한 손톱들이 햇볕에 타 어두운 살갗 속에 꽉 다물려 있었다. 그 손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내 손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조그마했다. 크고 새까만 아빠가 너무나도 좋았다. 일주일에 6일,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아빠가 때때로 알 수 없는 이유로 성질을 버럭 내도 금세 다시 좋아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이부자리에 누운 나와 동생에게 자장가를 불러 줄 때의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며 비오면 콧구멍에 비 들어간다며 내 못생긴 들창코를 놀릴 때 짓던 아빠의 함박웃음을 생각하면 심장이 살살 간지러웠다.
엄마도 좋았다. 어린 동생이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있을 때 곁에서 얼쩡거리자 엄마가 나에게도 모유를 주셨다. 정확한 맛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빈틈없이 만족스러웠던 느낌만큼은 생생하다. 어린 동생은 입으로 쭉쭉 빨아먹고 나는 컵으로 홀짝 홀짝 아껴가며 마셨다. 어린 마음에 우리 가족은 세상의 전부였다.
나이 앞자리가 갓 바뀌었을 무렵 온 나라를 뒤엎은 전염병과 함께 우울이 도졌다.
돌이켜보니 이룬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남들 다 따는 대학 졸업장 하나, 변변찮은 자격증 몇 개가 다였다. 그 동안 개인전도 몇 번 했지만 이후로 작업에 진전이 없었고 앞으로 계속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꿈과 희망은 수도 없이 갈팡질팡 했다.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던 탓에 늘 오게 마련인 작은 시련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코로나 시대의 서막과 함께 창이 한쪽으로만 나 있어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한 칸에 갇히자 이윽고 마음도 함께 갇혔다. 그럴싸한 직장도, 작가로서의 열정도,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고 시련을 버텨나갈 정신적 힘이 고갈 된지 오래였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이 모래를 씹어 넘기듯 힘겨웠다. 이불과 하나가 되어 이유도 모른 채 펑펑 울었고 자다가 깨서 유령처럼 돌아다니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비관적인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번 생은 망했으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는 한심하고 내 마음의 힘은 형편없이 약한 나머지 앞으로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들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했다.
때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둥근 원으로부터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쳐보았으나 관성의 법칙은 블랙홀처럼 자아를 빨아 당겼다. 구원투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계속 빙글빙글 도는 생각들과 함께 보기 좋게 나락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놀이공원 영업시간이 끝난 걸 모르는 회전목마처럼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대체로 그 생각들은 뒷맛이 썼다. 뱉어버리면 되는데 흐르는 눈물의 달콤함이 간혹 나를 어여삐 여겨준 탓에 잠깐 감정이 회복되었고, 그 틈을 타 다시 회전목마 선율이 흐르곤 했다.
현재 반려자가 된 당시의 남자친구가 나를 정신건강의학과에 데려갔다. 북적대는 시장통 한 가운데에 있는 하얀 요새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550문항이나 되는 MMPI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에 의하면 나는 피해의식이 있고 사람들을 잘 믿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나쁘게 받아들이는, 인지적 왜곡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경우는 가정에서 학대를 당했거나, 그럴 때 나타날 수 있는데 그런 거 없죠?”라고 말했다. 그런 거 없죠? 라니, 이 무슨 의뭉스러운 말인가.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런 건 없었다.
“네.”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에게 학대란 물리적 폭력을 의미했다. 회초리나 파리채로 맞은 적은 많아도 마구잡이로 당한 적은 없으니 가정폭력이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나는 난생처음 언어폭력도 학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사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잔인하게 다루어진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걸 그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새로운 발견이었다.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본 나의 이야기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했고, 언제나 진심어린 마음으로 내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내가 오랜 세월 심한 언어폭력에 시달렸으며 그로 인한 후유증을 지속적으로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보지 않으려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내 정신을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요새에 균열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이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잔인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두 가지 상반된 요소를 같은 선상에 놓고 이 사람이 실은 A이면서도 동시에 B야, 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마음이 북북 찢어졌다. 천사인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악마였다는 말과 같았다. 부모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들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과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분리하지 못했다. 몸은 분리해서 떨어져 나왔으되 나는 여전히 부모라는 자궁 속에서 먹이를 받는 태아였다.
언젠가 요가 선생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여태까지의 전적을 보면 정말이지 그른 것 같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얘, 너 부모님 영향권에서 벗어나 산 지 몇 년 되었지? 학교 졸업 후부터라고 치면 아직 10년도 안됐어. 네 인생엔 아직 전적이라고 할 게 없어.”
30년 중에 고작 10년도 안 되는 세월이라. 다 큰 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탯줄을 끊고 호흡을 하기 시작한 갓난애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나의 생각과 감정, 버릇, 습관, 태도와 자아인식은 아직도 부모님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모와 자식은 명백히 다른 인격을 가진 타인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일 피와 살과 뼈를 받은 것과 같이 세상을 보는 인식의 틀을 공유하고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패턴까지도 비슷하다면, 과연 그들이 진정한 객체로써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함께 사는 동안 부모님은 일상적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어린애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말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퍼부었고 별다른 이유 없이 버럭 화를 내 항상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 속에서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불완전한 인간임을 알기 때문이며, 뿌리채 흔들리며 견뎌온 그들의 삶의 진폭을 한 몸처럼 느끼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한 몸이었다. 그들은 나와 그들을 분리하지 않았고 나 또한 감히 그러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할 진데 사회적으로 이룬 게 있어 보람을 느낀다 한들 그게 과연 독립적인 건강한 자아가 누릴 수 있는 종류의 순수한 기쁨일까? 부모님의 렌즈를 낀 이상 그 무엇을 이룬다 한들 거리낌 없이 기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별개의 사람들이니까.
부모님과의 유착관계를 인정하면서 나는 혼란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