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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Oct 10. 2020

고졸 스무 살 은행원

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이계장은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취업이 되었다. 성인이 됨과 동시에 바로 직장생활을 해야 했던 그녀에게 은행이란 곳은 생각보다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지점에 갔을 때 그녀는 늘 주눅 들어 있었다. 실수를 연발했고, 그로 인해 혼이 나고 또 주눅 들고 하는 것이 연속되다 보니 늘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직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기도 했고, 이제 스무 살인 그녀에게 손님들을 상대하고, 상품을 팔고 하는 것들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은행에서 이런저런 고민과 하소연을 할 수 있는 상대는 은행 경비원 밖에 없었다. 같은 소속이 아니니 부담이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준 전임자는 이계장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던 게 떠 올랐다. 그녀에게 은행 경비원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는데, 그가 떠난다는 말에 많이 서운하고 섭섭했다고 했다. 또다시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쌓고,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새롭게 온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도 모르니 그녀에겐 내가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이계장과 친해질 수 있었다. 점심을 둘이서만 먹을 땐 말을 편하게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고, 난 이름을 불렀다. 이계장과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역시 상사를 뒷담화 하면서였다. 우리의 공공의 적은 바로 차장이었다. 처음 지점에 왔을 때 이계장은 주눅 들어있었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업무에 익숙해지고, 더불어 실수도 줄어들면서 처음엔 자신을 탓했던 것을 이젠 상사를 탓하기 시작했다. 점점 회사원이 되어 갔던 것이다.     


차장은 자주 이계장에게 자기 일을 시켰다. 특히 피피티 만드는 것을 많이 시켰다. 상대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하지 못하는 옛날 사람이었던 차장은 젊은 직원에게 자기 일을 떠넘겼던 것이다. 이것에 이계장은 불만이 많았다.


“아니 왜 자기 일을 자꾸 나한테 시키냐고요. 안 그래도 할 일 많아 죽겠는데. 오빠 이건 진짜 아니잖아. 아 빨리 다른 지점으로 가고 싶다. 저 사람만 안 보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아. 오빠 나 계단에 밀어줘 다리 하나 부러지면 회사 안 와도 되잖아. 그럼 차장 얼굴 안 봐도 되고. 아 맞다 산재처리되려면 은행 안에서 넘어져야 하나? 휴... 퇴근하고 싶다.”

     

그녀는 자주 나에게 자신을 계단에서 밀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그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고 그게 농담이지만 그녀는 늘 진지하게 농담을 말했다. 당장이라도 병원에 실려 가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일을 떠넘기는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다. 가끔 차장은 이계장의 사복에 대해서도 지적을 할 때가 있었다. 특히 금요일 저녁이면 이계장은 스무 살답게 아주 예쁘게 입고 출근을 한다. 당연히 퇴근 후에 있을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차장은 이런 구시대적인 말을 한다.


“00아 너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니니? 너는 생각이 있는 애니? 누가 회사에 오면서 그런 복장으로 출근을 해?”

 

웃긴 건 그 옷을 입고 일하지도 않는다는 건데 도대체 왜 그렇게 간섭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부턴 아예 옷을 가방에 넣고 와서 퇴근을 한 후에 지하철 화장실에서 갈아입는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짠하면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복장 가지고 뭐라 그러는 것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 일이 있었다. 이계장에겐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녀에겐 여동생이 있는데 둘은 일란성 쌍둥이다. 그런 점이 신기해 직원들은 그녀에게 상투적인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가령 쌍둥이는 진짜 서로가 잘 통하는지, 취미는 같은지 뭐 그런 뻔한 질문들 말이다. 그런데 하루는 차장이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다. 지금도 그 말을 생각하면 내가 다 치가 떨린다. 가끔 출근하면 아침을 거르고 온 직원들이 로비에 모여 빵을 먹으며 9시가 되기 전까지 수다를 떤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빵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장이 이계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00 씨 동생이랑 쌍둥이면 둘이 생리도 같은 날 해?”

     

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순간 내가 잘 못 들은 줄 알고 다른 직원들을 살펴봤는데 다들 표정이 이상했다. 그 질문에 이계장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들 정상적인 질문이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차장을 말렸다. 그런데 차장의 말에 더 어이가 없었다.     


“차장님.... 그런 말씀은 좀 그래요...”

“아니 왜들 그래 너도 하잖아. 이대리. 아 맞다. 희재 씨는 안 하지?”     


(참고로 차장도 여자다.) 아니 이 무슨 개소린가. 그 자리엔 나 말고도 남자 직원이 더 있었다. 남자 직원도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걸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볼 수는 있다. 그럼 적어도 남자 직원이 없을 때 조용히 단둘이 있을 때 물어보던지 아니면 그냥 네이버에 쳐 보던지 하면 될 것을 왜 아침부터 사람을 괴롭히는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듣고 이계장은 원래라면 울었을 텐데 이제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또라이 아니야? 그 자리에서 그런 걸 왜 물어봐 미친년이 진짜. 아 개 빡치네. 도라이 같은 년이 자기 딸년한테도 그런 거 물어보나 봐? 자기도 딸 있는 엄마면서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수가 있어? 오빠 나 안 되겠어. 아무래도 차장 성희롱으로 고소해야겠어. 꼭 성희롱을 남자한테만 고소하라는 법은 없잖아? 나 진짜 불쾌했어. 아 진짜 짜증 나!!!!!!!”

     

차장의 딸은 이계장과 불과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를 가진 직장 후배에게 어떻게 그런 막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는 그런 말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자신의 딸이 어디서 그런 소릴 듣고 왔다면 분노할 것이다. 사람은 이처럼 무지하면 한없이 무지할 수 있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확실히 그럴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잘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계장은 결국 본사에 신고를 했지만 그 일이 차장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단지, 본사 직원이 이계장을 어르고 달랬을 뿐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녀가 겪는 일치 고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한창 대학을 다니며, 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수업도 들으며 자유롭게 지내야 할 나이였을 텐데 일찍 사회에 나와 굳이 겪어도 되지 않을 일을 겪고 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H은행을 그만두고 이계장을 밖에서 따로 만났다. 그녀와 나 그리고 새로 온 은행 경비원인 장 씨 셋이서 신촌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회식 때는 그렇게 마시지 않던 술을 밖에서는 엄청 잘 마셨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오빠!!! 우리 지점 곧 있으면 없어져!! 나 집 근처 지점으로 갈 것 같아!! 이제 출근도 가깝고, 딴 것보다 차장 얼굴 아침마다 안 볼 생각하니까. 진짜 밤마다 출근하는 게 너무 좋은 거 있지? 드디어 내 소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셨나 봐. 진짜 좀 일찍 들어주시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짠할까? 짠~~!!” 

    

그 후로 연락을 하고 지내진 않지만, 그녀가 새롭게 간 지점에서 부디 잘 지냈으면 좋겠고,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른 나이에 사회에 나와 자신의 몫을 다 해내는 그녀가 대견하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나 또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비록 고졸 은행원이라는 딱지가 그녀에게 앞으로 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꼭 은행원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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