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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아동 학대는 귀신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세트장 밖의 삶을 위하여


 '개딸의 도둑결혼식'은 최소한 두 덩어리로 나누어 쓸 예정이었다. 따라서 이 글의 느슨해진 호흡이 이 이야기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지금까지의 내 얘기가 '아동 학대 생존자'를 자처할 만큼 비참하지는 않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평범한 가정에서 있을 법한 일을 내 '상상력'으로 비틀어 해석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내가 당한 일을 규정하는 것은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동 학대를 당했다. 이 말이 엄마를 부수고 또 아버지를 광분케 하겠지만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게 나를 학대 생존자 이외의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두 개의 명제는 양립할 수 있고, 설령 사랑이 눈을 가려 내가 이 원고를 포기하는 날이 오더라도 언젠가는 끝마쳐야 할 글이다. 그게 내가 클로드 몰래 한 번씩 화장실에 틀어박혀 울면서도 이 글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살다 보면 힘든 이야기를 해야 할 날이 온다. 내게는 그것이 지금인 것이고. 그렇지만 힘든 이야기를 한 후의 경직된 날들이 해야 할 이야기 위에 지어진 평화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가 원하는 바를 위해 형편이 되는 만큼 노력하면 그만이다. 가치 있는 것은 그 노력이다. 그래서 서른도 다 넘은 지금 화장실 문 뒤에 무너져 흘리는 눈물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 믿는 것이다.


 내가 준비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은 후에도 여러분은 절대, 길 위를 걷는 나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일단 아버지는 본인이 3인분의 인생을 어떻게 망쳤는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을 떠나 사는 중이라 아버지를 대하는 시간이 1년에 채 하루도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가진 혐오가 잘 다진 평정심 위로 뚫고 나올 여지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부정하지만 그녀는 아버지 없는 삶에 가진 불안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그게 엄마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환갑이든 서른이든 이혼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 한국 사회는 잔혹하다-, 율이는 나만큼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도려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여전히 엄마의 배우자로 우리의 등본에 머물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아버지에게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은 나와 아버지를 더 친해 보이게 만든다. 그건 우리가 친해서라기보다는 아버지가 배려라는 걸 받을 자격이 없어서일 뿐인데도. 나이 때문에 기력이 딸려 유해진 구석이야 있지만 아버지는 여전하다. 자신만이 정의이고 군림자인 단단한 자아의 성에서 자기 연민의 단물을 마시며 산다.


 아버지가 가족보다는 외부와의 관계에 오만 노력을 다 쏟아서였을까, 아빠가 어린 자식들 태권도 회비 밀린 건 괜찮아도 장성한 조카들 용돈 부족한 꼴은 못 보는 사람이어서였을까? 사람들은 우리더러 이만하면 '행복한 가족'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런 것 같은 착각에 빠졌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엄마는 아버지가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고, 말만 그렇게 했지 정말로 우릴 길바닥에 내몬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만하면 우리도 괜찮게 사는 거라 했다. 엄마가 입술에 침을 안 발라서 그런가, 행복하단 표현은 차마 못 쓴 걸 보면 엄마도 그 말을 할 때 우리가 '괜찮게 사는' 거라는 확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참 이상하지, 적어도 그 동네에서 가정 폭력이며 애 잡는 걸로 이름을 날린 게 우리 집은 아니었다. 식당에 드나드는 손님들마다 우리더러 화목한 가족이라 했다. 엄마가 예쁘고 아빠가 잘 웃는다는 대단히 멍청한 이유로 말이다. 나는 그게 정말 이상했다. 아버지가 도사견 같은 눈빛을 하고 소주병을 바닥에 내려칠 때마다 엄마는 창백해진 손을 감추고, 나와 율이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하는 게 화목이라는 말과 어울린단 말인가.


 실제 학대의 피해 경험이 있는 사람마저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엄마는 그 세월을 헤쳐 나온 지금도 가정 폭력이 소위 '문제 있는 인생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고-본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여긴다-, 나 또한 아동 학대라는 글씨를 보면 곰팡내 나는 벽과 영화 '유령 신부'에나 나올 법한 가상의 부모를 떠올린다. 눈빛이 매섭고 지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한다. 하지만 이런 정형화된 이미지만이 아동학대나 가정 폭력의 전부는 아니다. 이러한 폭력은 영화 '기생충'의 무대가 되는 고급 주택에서도, 평범한 아파트에서도, 반지하 빌라에서도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폭력이 이루어지는 장소나 가해자의 인상 착의는 폭력의 행사 여부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흉악범들의 사진을 일반인들의 사진과 섞어 보여주면 아이들은 흉악범을 가려낼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이 인상의 험악함에 따라 사진을 추려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다른가? 얼마나 다른가? 어른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피해자를 자처하고 있는 나는 다를까? 나는 세 집단의 흉악범 탐지 성과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법정에 선 수많은 아동학대 가해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들 중 아동학대의 일부가 가정교육의 명목으로 포장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아동들의 완성되지 않은 판단력을 파고들어 무죄를 주장할 것이다. 설령 작은 사람들의 판단력이 여물지 않았다 해도 이들 작은 사람들은 판단력의 미흡을 보완하고도 남을 날카로운 감을 가지고 있다. 학대 가정의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날카로운 감이나 연령에 어울리지 않게 발달한 판단력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학대 가정은 만만한 전장이 아니어서다-발달보다 퇴화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의 생존전략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어른이 아니어도, 학대의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작은 사람들은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폭력의 위화감을 날카롭게 감지해낸다. 어제는 웃던 엄마가, 아빠가 오늘은 목소리를 찢어 내며 매를 잡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작은 사람들은 누구보다 빨리 어른이 된다. 가해자는 사랑과 훈육을 명분으로 잡고 피해자는 구도자의 자세로 고행길을 걷는 참으로 우아한 수라장이 완성된다. 이 수라장에서는 누구도 귀신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며, 학대는 귀신의 집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작은 구도자들이 어른이 되어도 크게 변하는 것은 없다. 코끼리가 어려서부터 걸고 다닌 사슬을 끊지 못하듯 이들 구도자들도, 다시 말해 피해자들도 가족의 이름으로 예쁘게 칠한 이 가시 사슬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들 중 몇이 좀 더 넓은 숨구멍을 찾아 헤매다 가족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해도 당장 먹고 살 일이 목덜미를 틀어쥔다. 그나마 먹고살만해지면 그제야 학대의 기억과 온갖 후유증이 삶을 짓누르는데, 적어도 10년은 된 일이다 보니 학대 사실은 이미 가해자의 머릿속에서 '그때 그 시절' 따위의 이름으로 덧칠된 후다. 피해자만이 기억한다. 지독할 만큼 생생히.


 우리가 당한 건 '사랑' 때문이었고, 우리가 '기억하는' 건 우리가 은혜도 모르는 쌍놈이어서라고. 이러나저러나 피해자가 매도당하기는 매한가지인 범죄다. 아동 학대는. 그런데 이중 무엇도 우리 잘못은 아니다. 우리 잘못인 적은 없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하는 것,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바람이 그들의 말처럼 '은혜도 모르는 쌍놈의 짓거리'라면 문제는 온전히 그들 삶의 방식에 있다.

 


 아프지 않은 길도 훌륭한 길이다. 가능한 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들 삶과 당신 삶 사이의 경계가 보일 때까지 멀리 달아나는 게 왜 욕을 먹을 일인가.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진짜 삶을 얻기 위해 거친 과정을 기억하라. 그들이 만든 수라장, 그들이 만든 세트장을 벗어나는 과정은 운전사가 딸린 롤스로이스의 뒷좌석에서 누리는 드라이브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폭풍우를 뚫는 류의 거친 투쟁이다. 그 폭풍우의 너머에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규칙, 그들의 세트장이 아닌 당신만의 규칙을, 그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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