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지켜도 되는 사람
왜 하필 프랑스를 택했냐는 질문들을 많이 받았다. 당장 옆에 일본도 있고 중국도 있고 미국도 있는데 왜 하필 프랑스냐고. 프랑스 자체가 동기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저 옆집 살던 언니가 쓰던 프랑스어 교재며 사전을 내가 물려받았으니까. 엄마가 지우개로 열심히 지워 깨끗이 만들어준 교재로 공부하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었으니까. 가능한 한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던 차에 그들이 나를 고용했으니까.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그 교재의 매 단원 사이에는 에스카르고니 아페호(식전주) 문화니 하는 프랑스 이야기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흥미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보다는 체제비니 항공비니 하는 것들을 회삿돈으로 해결해서 아버지의 주 무기인 '나한테 손 벌릴 생각 마라'를 봉쇄하고 멍청해진 얼굴을 감상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나한테 돈을 주겠다고 한 건 일본도 태국도 대만도 아닌 프랑스 회사였으니까. 그뿐이다. 아니, 사실 그뿐은 아니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나만 생각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내 행동의 바닥에 가라앉은 건 나뿐이고, '아버지가 지랄할 테니까'나 '동생의 학비가 인질로 잡힐 테니까' 같은 걸 걱정하지 않는 삶 말이다. 아빠 카드니 송별 파티니 하는 건 정말이지 바라지 않았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늘 손바닥에 손톱자국을 내며 '제발 돕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가만히만 있어줬으면 좋겠어' 따위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결국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는 엄마도, 엄마를 지킨답시고 끓는 물속의 기포처럼 사방을 활보하는 나도 지긋지긋했다.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뭘 지키네 마네 하는 게 삶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 보통 사람.
'평생 그러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삶에 한 번이라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건데 그 정도는 바라도 되잖아.'
틈만 나면 스스로에게 변명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약해진 마음 때문에 눌러앉겠다고 헛소리를 할까 봐. 기숙사행을 선택하고, 함정 생활을 선택-징병제를 시행 중인 나라이니 만큼 선택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다-한 율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또 모른다. 세 달 근무하고 짤려서 돌아오는 결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로 엄마를 달랬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그런데 세 달은 1년이 되고, 1년은 또 3년이 되고, 가정의 행복보다는 그 굴레에 시선을 던지던 비혼주의자 천람은 내게 소리를 지르지도, 내 선택을 가로막지도 않을 남자와 가족이 되었다. 율이는 엄마 말마따나 '양반'이라 '거봐, 내 말 맞지?' 같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율이 말이 맞았다. 어떻게든 살아졌고, 엄마는 내 부재도 버텨냈다.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자각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우리를 '니들'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말이 자식과 부인의 정체성을 빚어낸다는 어떤 전능감을 얻었던 것 같다. 그는 더 큰 목소리로 어머니를 '거짓말쟁이', 그리고 나와 율이는 '거짓말쟁이에게 세뇌당한 반푼이들' 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좋은 건 자신을, 나쁜 건 엄마를 닮았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을 나누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나와 율이에게는 자신이 들은 것보다는 스스로 보고 느낀 것을 믿는 힘이 있었다. 얼음땡 게임 같은 인생이었다. 아버지의 말이 엄마를 얼리면 나와 율이가 엄마를 '땡' 해줬고, 아버지의 말이 나를 얼리면 엄마와 율이가 '땡' 해주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살아냈다. 이름 없는 '니들'이 될 뻔한 우리 셋의 자아도 '땡'해서 다시 3인분으로 돌아가게 해 준 건 율이었고. 그 세월 동안 엄마도 자랐다. '너희만 아니었으면...(옛날에 도망쳤지)'을 입에 담았던 어린 엄마는 조사를 하나 바꿔 '너희가 아니었으면...(안 살았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부셨지만 엄마는 붙였다. 나나 율이가 손 틈새로 흘러내릴 때마저도 엄마는 끝까지 노력했다. 우리가 적어도 이전처럼 사람 모양으로 굳을 수 있도록 틀이라도 만들었다. 이게 내가 엄마를 용서하고, 아버지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 꿈을 비웃는 사람과 그 꿈이 탐탁지 않아도 맨발로 나와 환송하는 사람의 차이다.
엄마와 나는 식성도, 취향도 비슷했다. 내 모습이 아빠를 닮을 수록 '것봐 너도 천씨잖아' 라고 말하는 엄마가 떠날까 무서워 부러 엄마 흉내를 냈던 것도 있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내 삶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끔찍하게 아팠다. 가장 아픈 손가락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며 석고 본을 뜨는 듯한 나날이었다. 둘이 무슨 작당모의라도 할까 무서웠는지 아버지는 나와 엄마가 방에 문만 닫고 있어도 성질을 냈다. 실상은 양 두 마리가 등을 맞대고 벌벌 떨고 있는 것에 불과했는데도. 그렇게 벌벌 떠는 동안 엄마가 내게, 내가 엄마에게, 또 율이가 우리에게 조금씩 흘러든 것도 같다. 아직도 엄마의 아픔은 나의 상처이고, 엄마의 낙이 나의 환희인걸 보면 우린 아직도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전후의 규칙이 전장에서의 규칙과 같을 수 없듯이, 우리가 '니들'이 아니게 된 오늘. 각자가 살아가는 모습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프랑스에 온 후로 몇 번이나 울었을까. 이제 나는 밥그릇을 뺏긴 개가 아니고, 엄마 또한 맨발로 비행기 뒤를 쫓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니들'이 아닌 우리가 조금 쓸쓸할지는 모르겠지만, K-며느리는 크레이지 코리안 장녀의 자랑이다. 언제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