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의 해체
그렇게 어른이 된 후에도 '니들'의 운명은 한 덩어리라 굳게 믿었던 우리다. 그러니 어릴 적에는 어땠겠는가. 코리안 장녀에게 주어진 첩보 임무는 동생의 교우관계 탐색 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본인 핸드폰 곁에만 있어도 질색을 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게임머니 충전을 위해 아버지의 성질도 개의치 않고 그의 핸드폰을 낚아채는 것은 이 집에서 나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낸 후에는 게임머니 충전에 관한 문자 내역을 지우고 아버지가 원래 사용하던 화면으로 돌려놓아 의심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엄마는 나의 이런 점에서 간자(間者)로서의 재능을 읽었던가 보다. 엄마가 먼저 부탁을 했던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당시 나는 아버지가 몇 번인가 여성과 통화하며 시끄럽게 웃는 소리를 들었었고, 게임 머니 때문에 아버지의 핸드폰을 열어볼 때도 통화 내역 란에 같은 여자 이름이 몇 번이나 찍혀 있는 걸 기억해 두기도 했었다. 엄마가 먼저 부탁했다 한들 내가 적극적으로 거기에 가담할 토양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애한테 시킬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니들'로서의 삶은 그다지 자랑스러울 만한 것도, 신나는 일도 못 되었다. 그저 아버지를 정탐하는 것이 동생의 교우관계를 생선 발라내듯 파해치는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동생은 착한 놈이었고 아버지는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게임 머니 충전은 간단했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가있는 동안 우리 방에서 안방까지 몇 번만 왕복하면 끝마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첩보 활동은 좀 더 복잡했다. 한두 번은 들켰다는 뜻이다. 결과가 어땠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지고, 아버지는 몇 번이나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내가 계집애라는 이유로 눌러 참고. 그 후로는 아버지가 화장실에도 휴대폰을 들고 가는 바람에 윤택한 게임 생활에도 차질이 생기는 등의 일이었다. 그걸로 이 국정원 꿈나무의 험난한 여정이 막을 내렸더라면 어릴 적의 해프닝 정도로 기억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나의 첩보원 생활은 아버지가 어느 순간 경계를 풀고 내가 중학교를 넘어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불륜 동호회 네이버 카페에서 부모의 유책 배우자 선정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비록 당시의 내 일과가 엄마의 생사를 걱정하고, 또 노후에 홀로 남아 싸늘히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나는 아직 아버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게 가족으로 남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을지언정, 조금이라도 애정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할 만한 활동은 못 되었다. 문제의 자료는 아직도 내 외장하드에 잠들어 있다. 나의 부모는 법원 문턱을 몇 번이나 밟았지만 내가 32살을 넘긴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서류상으로도, 실생활에서도. 이런 것좀 시키지 말라고 대들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런 소리는 안 했었다. 이런 거라도 해야 엄마가 옥상에서 몇 발짝 더 멀어질 거라 굳게 믿었던 것도 있고, 이런 자료 하나하나가 우리 '니들'만의 생활로 이어질 동아줄이 될 거라는 생각도 조금 있었다. 당시에는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자식에게 아비의 행실을 추적해달라 부탁하는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너덜너덜했을까, 가족도 친구도 못 만나게 막는 아버지 때문에 의지할 친구라고는 딸 밖에 없는 처지가 얼마나 설웠을까. 시간이 지났기에 비로소 읽히는 감정들이 있다. 니들은 이렇게나마 살아나갔다. 그러는 동안 우리 셋의 명예도, 우리 셋의 미래도 점점 녹아 하나로 합쳐지는 듯했다. 하나가 아닌, '니들'이 아닌 우리는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타고난 가족이 마음처럼 살아지지 않았던 만큼 나머지 셋이라도 끈끈하게 뭉쳐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어릴 적에는 집안에서만 싸우면 그만이었는데 자라면서 할 일이 점점 많아졌다. 학교 공부도 해야 했고,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첩보원의 임무도 수행해야 했고, 동생이나 엄마가 각자의 자리에서 험한 꼴을 당하고 오면 본인보다 더 펄펄 뛰는 분노 대변인 역할도 했었다. 이 집에서 IT에 관심이 있었던 게 나뿐이었기 때문에 세금 처리나 아버지의 벌금 납부, 가게 포스기의 문제 해결 같은 것도 점점 내 일이 되어갔다. 잔돈 심부름이나 가게 납품 전화 같은 잡일은 우리 중 누구나 하는 것이었으니 별스럽지 않았지만 가끔 '나 열여섯 살인데'나 '열여덟이면 애 아닌가?' 같은 생각들이 스칠 때가 있었다. 더 빨리 어른이 되면 더 빨리 탈출할 수 있다는 희열이 더 컸기 때문에 그런 순간은 길지 않았다. 그래도 애답게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면 아찔할 만큼 부럽다가 또 부러움이 들고 난 자리를 분노로 채웠다.
뜻밖에도 가장 먼저 '니들'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은 동생인 율이였다. 엄마는 늘 율이더러 섬세하고 연약한 아이라고 했는데, 내 눈에 비치는 율이는 그런 애가 아니었다. 아빠가 율이더러 심약하다며 닦아세우는 바람에 엄마마저 그런 착각에 빠져들었지만, 내 동생은 그따위 착각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심약하다는 부모님의 인식을 깨기 위해 절차탁마하는 일도 없었다-엄마가 영재교육 조로 혹독한 환경을 조성했지만 이건 율이의 의지가 아니었으니 논외로 치겠다-. 율이에게는 제 속도가 있었다. 내 동생은 날더러 제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며 부러워했지만 나도 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걸음은 부모님의 말에 한 번씩 꼬이기 일쑤였으니까. 율이가 뭘 하든 응원하리라 생각했지만 동생이 처음으로 '니들'에 묶이기를 거부하고 기숙사 행을 선택했을 때는 꽤나 서운했다. 율이가 어른이 된 후부터 나 또한 동생이 나와 함께 엄마를 지키기 위해 싸워줄 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한번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모두에게 옳은 선택이었다. 누구도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이 집에선 K-며느리도, 크레이지 코리안 장녀도, 그리고 크레이지 코리안 막내도 터져 나오는 울분을 나름대로 막아 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 '니들'이 셋에서 둘이 되느니 어떻게든 제 살길 찾아보겠다고 떠나는 건 절대 서운해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