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
2016.09.11
Darmstadt, Deutschland
쌀쌀한 공기를 제치고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다름슈타트. 프랑크푸르트에서 S반을 타면 40분쯤 걸리는 도시다. 가이드북의 설명부터 "예술과 과학의 도시"라 못 박힌 이곳은 작지만 알찬 도시였다.
트라우마가 생긴듯한 교통편 끊기를 완료하고 조금 헤매며 열차를 탔다. 중간에 불안함이 덥석 몰려들어서 근처의 여자분께 다시 한번 목적지가 맞는지 확인했다.
무언가를 물어보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자. 물어봐야 산다. 몇 번이고 내 인생의 등대가 될 말을 되뇌며 철판을 깔았다. 덕분에 역을 놓치지 않고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해.'라고 인류애가 충전된 직후, 한국에서도 잘 안 보였던 앵벌이가 나타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집시"의 외관이었다. 떡진 머리와 보풀이 잔뜩 일어난 옷, 반쯤 부서진 이빨은 흰 부분보다 검은 부분이 더 많았다.
플랫폼을 나오자마자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거는 바람에 가슴이 놀라 두근거렸다.
"i don't speak german"
빠르게 말하고 지나가자 뒤에서 "이건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야!"라고 궁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에겐 그거나 그거나 내가 모르는 말인걸. 하다못해 한국어도 그렇게 갑자기 들어오면 이해가 안 될 거다. 혹시나 따라올까 싶어 빠르게 역사를 나섰다.
트램을 타는 내내 속으로 꿍얼거리며 잊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할 때 훅 들어온 타인의 얼굴도, 요청을 거절했을 때의 욕설과 함께 일그러지던 얼굴도 잊히지 않았다.
나중에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때의 내가 불편했던 이유를 다시 되새겨 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사람의 태도와 행동도 불편했지만 더불어 그 사람을 불편해하는 "나"도 불편했다.
타인에게 상냥하지 못했던 "나", 외모만 보고 겁을 먹은 "나",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다 느낀 "나" 에게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한때는 그런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불편해했던 나의 모습은 생존본능이 켜진 "나"일뿐이고 타인의 기분보다 나의 안전을 밑에 두었기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이제는 그런 태도가 스스로를 얼마나 깎아 먹는지 알기에 그때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두려워할 때 날카로워지고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해도 그건 무례하거나 나쁜 게 아니다. 나의 생존본능일 뿐이다.
안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하루를 망치기에는 나는 너무 아쉬움이 많은 사람이다. 트램을 타고 목적지인 게오르그 정원에 내리며 감정을 갈무리했다.
화창한 날씨아래 기대보다는 작지만 예쁜 건물이 보였다. 왕자궁이라는 이름에 조금 크고 화려한 곳을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보인 것은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작아 보이는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는 정원이 예쁘게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메인은 건물이 아닌 정원이란 걸 보여주는 규모였다. 9월인지라 꽃보다는 과실수와 채소처럼 보이는 풀들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마치 유복한 전원주택을 보는 기분이었다. 개인의 취향을 따지자면 나는 이쪽이 좀 더 취향이었던지라 만족스러웠다. 바람을 맞으며 이런 건물이라면 좀비 사태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의 가운데에는 붉은 해시계가 놓여있었는데 가리키는 시간이 핸드폰과 얼추 비슷했다.
왕자궁 안은 도자기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매표소로 보이는 작은 창구에는 할머님 한분이 앉아계셨다. 나를 보더니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셨다. 뭐지? 싶었는데 학생이냐 묻는 말에 그렇다 답하고 5유로 지폐를 내밀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으신지 계속 입술을 달싹거리셨는데 잔돈을 주시면서 독일어로 딱 한 문장 물어보고 내가 못 알아듣자 그저 고갤 저으시고 들어가라 손짓했다.
아마 설명이나 다른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었는데 할머니는 영어를 못하시는듯했고 나는 영어와 독어를 다 못했기에 이루어진 대치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건물 내부는 오래된 저택 같았고 마룻바닥을 밟을 때 삐걱이는 소리가 나는 부분도 있었다. 운이 좋게도 다른 관광객도 없어 홀로 그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유리찬장 안에 알록달록한 도자기들이 가득했다. 그림이 그려진 식기들을 보다 보면 왜 사람들이 오래된 접시들을 수집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Vintage"라는 단어가 고급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천천히 구경해도 워낙 작은 곳이라 금방 다 볼 수 있었다. 관람 끝부분에서는 다른 관광객들도 들어와 작은 공간이 복작복작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다름슈타트 궁전이었다. 레지덴츠 궁전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다름슈타트가 헤센 공국이던 시절 대공이 머물던 성이었다. 전쟁 때 부서진 성을 복구하여 일부는 박물관으로, 일부는 다름슈타트 공과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공간 사용법 같았다.
신나게 입구로 들어가 표를 끊으려 하니 친절한 직원이 웃으며 1시간 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청천벽력을 전해주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곳은 관광객에게 공개되지만 단독관람은 불가하고 정해진 큐레이션 시간대에만 입장이 가능했다. 여기까지 와 놓고 안 보고 돌아가긴 너무 아쉬웠고 결국 날도 좋겠다 동네 구경이나 더하자 싶어 표를 끊었다. 얼결에 1시간 넘게 시간이 뜨고 1시간짜리의 영어 강의까지 듣게 되었다.
딱 점심시간대인지라 식당이라도 들어갈까 했지만 아직까지 외국어 주문은 너무 무서웠다. 결국 근처 벤치에 앉아 가져온 물과 간식으로 배를 채웠다. 여행을 시작하고 조식을 제외하고는 때에 맞춰 먹은 밥이 거의 없었다.
갔던 길 또 가고 봤던 거 또 보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지도를 봐도 헷갈리는 통에 같은 골목만 3번쯤 봤을 때 그냥 내가 길치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구글지도에서 내 위치가 너무 이상하게 나와서 그렇다. 이미 한참 전 지나간 골목에 내가 있다 뜨니 나로선 헷갈릴 수밖에!)
더 돌아다니단 레지덴츠 궁전에 들어가지 못하겠다 싶어 적당할 때 궁전으로 돌아왔다. 아까 밝게 인사해 준 독일에서 보기 정말 드문 쾌활한 직원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투어는 정말 소수인원으로 이루어졌다. 나와 중노년 부부, 두 명의 여행객 그리고 친절한 직원. 그렇게 모험 파티가 결성되었다. 친절한 직원분(이하 가이드)이 열쇠꾸러미를 챙겨 들고 파티원들을 불러 모았다. 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우리는 작은 쪽문 앞으로 향했다.
편의상 박물관이라고 표기했지만 레지덴츠궁에 전시된 물건들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또는 관계된 문화유산들이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보다는 경복궁에 더 가까운 장소다. 나와 파티원들은 예상치 못한 오래되고 작은 문 앞에서 가이드가 열쇠로 문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 기대와는 다른 시작에 심장이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사람들이 다 들어오면 도로 문을 잠갔다. 다음문이 열리기 전까지 우리는 밀실에서 설명을 들었다. 그 덕인지 투어 내내 나는 비밀스러운 수장고를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독일인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관람객은 외국인이었기에 가이드는 독일어와 영어를 번갈아가며 설명해 주었다. 두 가지의 언어로 역사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고 낭만 가득했다.
투어 내내 나는 영어공부를 미리 해두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그러나 용케도 큰 흐름은 따라갔는데 아마도 가이드의 느리고도 유쾌한 설명덕이었을 터다.
그날의 메모를 첨부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짧게 쓴 메모지만 몰아치는 정보와 쏟아지는 문화에 어쩔 줄 모르던 심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오타는 애교로 넘어가주시라)
1시간 동안의 투어가 끝나고 우리 파티는 가이드에게 길고 긴 박수를 선사했다. 마지막까지 환한 웃음이 인상 깊었던 사람이다. 레지덴츠를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명한 건물을 보러 갔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이름을 들은 적 있는 건축가의 건물이었다.
후에 바르셀로나 일기에서 더 적겠지만 나는 유럽여행을 다니며 특이한 건축물을 몇 군데 찾아다녔다. 전문가도 아니고 공부를 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사진 속의 그 건물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발트슈피랄레> 역시 그런 건물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으로 모든 면이 곡선으로 이루어진 주거용 아파트다. 내부는 실제 거주자가 있기에 들어갈 수 없고 안뜰까지는 입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극강의 쫄보였기에 혹시나 거주자를 만날까 봐 안뜰까지도 못 가고 건물 외관만 열심히 구경하고 돌아 나왔다.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보이던 그 건물은 멀리서 보면 오래된 빌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금씩 건물에 다가가면 갈수록 이질적이고 어색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볼수록 울퉁불퉁한 벽면과, 제멋대로 달린 창문은 조잡스럽다는 감상마저 가져다준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건물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서 보면 어찌어찌 잘 섞여 들어가는 거 같지만 그럼에도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제멋대로에 다른 것과 다르다는 게 확 티가 난다.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에 이토록 감정이입을 하다니. 내가 외롭긴 외로웠구나 싶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도 지쳐 도시의 중앙역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꼼꼼하게 열차를 확인하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탔다. 머릿속이 와글와글 시끄러워 메모장을 켰다. 두서없이 기억나는 걸 다 적으면서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찬찬히 정리해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지만)
숙소로 돌아와 같은 방에 머무는 여자분과 저녁을 먹었다. 첫날부터 함께한 이분은 개인사정으로 장기간 머무시는 분이었는데 미소가 보기 좋은 밝은 분이셨다.
숙소와 멀지 않은 레스토랑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날씨도 딱 좋아 라들러 한잔을 걸치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의 계획이나 지금까지의 감상, 독일인들이 만드는 맛이 요상한 아시아푸드에 대해 말하며 깔깔거렸다. 유럽에서의 첫 번째 맥주와 첫 번째 식당이었다.
앞으로 이 글에는 술이야기가 꽤 나온다. 내가 방문했던 나라들은 18세가 넘으면 음주가 가능했다. (독일은 맥주와 와인에 한해서는 16세다!)
내가 유럽을 여행할 때는 만 18세로 한국에서 주류 판매가 금지되는 나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전부터 부모님의 허락과 보호아래 맥주 1~2잔 정도는 자주 마셨고 본인의 주량도 알고 있었다. 맹세컨대 나는 한국에서 불법적으로 술을 구매한 적이 없다. 단언하건대 내가 미성년 때 한국에서 먹은 술은 모두 보호자가 구매한 것이다.
혹여나 내가 술을 마시는 게 불편하신 분들은 빠른 하차를 권유드린다. 독일에서 맥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한국에서 김치 없이 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