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와 시작 사이
2016.09.12
Frankfurt am Main, Deutschland
무계획 여행이라도 계획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루종일 숙소에 앉아 예약 사이트들을 들락거렸다. 다음도시, 도시로 가는 기차 편, 숙소, 그리고 그다음 도시까지. 하루에 4개를 해치우니 진이 빠졌다.
더군다나 남의 말만 듣고 홀랑 결정한 일이라 일정이 꼬였다. 팔랑귀가 되지 말자고 다짐한 지 3일이나 되었을까? 다시금 팔랑이는 귀 덕에 머리를 싸매었다.
그렇게 다음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끊은 지 30분 만에 나는 후회를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다음 도시를 고민하고 있었고 '대충 가고 싶으면 가면 되겠지~'라는 안일함이 있었다. 동쪽으로 갈지 북쪽으로 올라갈지 고민하던 나에게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아저씨가 "쾰른"을 추천해 주었다.
지나가는 식으로 튀어나온 이 도시는 거대한 성당이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리고 나는 성당을 보는 순간 쾰른행 기차를 끊었다. 하하.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바로 후회했지만 독일의 환불시스템은 외국인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나는 티켓을 버리기 싫으면 쾰른을 가야만 했다.
쾰른행을 후회한 이유는 다름 아닌 숙박 때문이었다. 기차표를 끊고 들어간 숙소 사이트에서 내 예산에 맞는 숙소가 한 개도! 단 한 개도!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도시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지 저렴한 도미토리부터 내가 겨우 비벼볼 만한 비즈니스호텔까지 죄다 만석이 떠버렸다.
남은 거라곤 1박에 30만 원을 넘어가는 무서운 호텔들 뿐이었고 그마저도 방이 실시간으로 빠지고 있었다. 아차 하다 노숙을 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돌아올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쪽도 좀 있으면 개최될 박람회 덕에 자리가 만만치 않았다.
3일 동안 굶고 호텔방을 잡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작은 도시가 눈에 띄었다. 쾰른과 프랑크푸르트 사이 작은 도시인 코블렌츠, 그리고 거기서도 조금 더 들어가야 나오는 작은 마을인 바트엠스(BadEms). 그곳의 작은 호텔이 내 다음 숙소가 되었다.
숙소도 해결하고 앞으로 4일의 일정도 정해졌겠다 나는 미뤄둔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세웠던 몇 가지의 버킷리스트가 있었는데 이참에 해치워버리기로 한 것이다.
며칠간 모았던 엽서를 펼치고 악필을 어떻게든 읽을 수 있게 변환시키며 글을 적어 내렸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주소를 받아온 가족과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내 여행을 응원해 준 엄마 친구들의 주소도 따라 적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보내고픈 사진도 많지만 딱 한 장에 다 채워 넣으려니 은근히 어려웠다. 제발 무사히 전달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Süd korea를 꾹꾹 눌러쓴다. 이 독일어 한 단어면 이 먼 땅에서 한국까지 배달된다니! 문명의 다른 이름은 마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2016.09.13
Frankfurt am Main, Deutschland
이날은 내 여행에서 유일했던 "한국어 투어"날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한 바퀴 도는 투어였는데 날씨 운과 가이드 운이 정말 좋았었다.
9시가 조금 넘어 숙소를 나섰다. 출근하는 양복쟁이 아저씨들을 보면서 이 시간에 출근이란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휴식을 하러 와서 일하는 사람을 부러워한다니. 아이러니다. 하지만 주 6일 9시 오픈을 위해 집을 나서다 보면 9시에 집을 나서는 이들이 너무너무 부러웠다. 동시에 내가 놀고 있을 시간에 나 대신 일을 하고 있을 엄마가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투어는 편했다. 영어가 있으면 감지덕지했던 지난 일주일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한국어로 이야기를 들으니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가이드분은 친절했고 쾌활하셨다. 누군가가 나의 선택을 도와주고 보조한다는 건 굉장히 편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투어라는 형식자체가 나와 잘 맞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알차게 보고 가자 마음먹고 따라다녔다. 영어로는 도통 어려웠던 독일과 게르만족의 역사와 그 유명하다는 종교개혁이야기까지 들으니 이제껏 봐왔던 독일이 조금 더 이해가 갔다. 웅장한 대성당도, 볼 거 많은 괴테하우스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뢰머광장이었다.
푸른 하늘아래 결혼식이 열리는 작은 구시청사도, 귀엽고 알록달록한 집들도 예뻤지만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바닥에 박힌 동판 하나였다.
33년에 나치 지지자들은 뢰머광장에서 "반 독일주의" 책들을 불태웠다. 대다수가 철학책과 과학책들이었다. 동판을 둘러싸고 있는 독일어 문구는 "책을 불태운 곳에는 사람을 불태운다"는 의미다. 이보다 무섭고 이보다 통찰력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따스하다 못해 더운 땡볕아래서 오싹함이 느껴졌다.
투어 내내 한국어로 전해오는 정보는 즐거웠지만 다수가 움직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불편함이 곱절로 느껴졌다. 나의 휴식시간에 강제로 매칭된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투어의 질도 좋았고 가이드분도 좋았지만 투어를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끝났다!"라는 해방감이 들었다.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지친 다리를 부여잡고 내일을 위한 짐정리를 시작했다.
내일이면 프랑크 푸르트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향한다. 잘게떨리는 가슴이 불안인지 기대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이길.
나는 이후의 다른 여행에서 시내투어는 이용하지 않았지만 혼자 가기 힘든 지역은 종종 투어를 이용했다. 투어는 뚜벅이 여행에서 오는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다 생각한다. 다만 혼자보다는 일행이 있을 때, 그냥 휴가를 보낼 때보다는 목적(관람, 도시이동 등)이 뚜렷할 때 투어를 이용하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