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경험
2016.09.15
Koblenz, Deutschland
비싼 돈과 심력을 소모한 덕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배가 고팠다. 잠옷을 대충 갈아입고 조식 먹는 곳으로 향했다. 식당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죄다 백인들에 어제 본 부부가 그나마 제일 젊은 나이였는지 평균연령이 60은 넘어 보였다.
문을 넘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최대한 눈을 안 마주치려 하는데 음식을 뜨는 내내 따라오는 시선들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동물원의 원숭이들이 이런 기분일까? 혹시나 내가 실수한 게 있나 싶어 되짚어보지만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다 그냥 내 얼굴이 눈에 띄는 거구나 깨달았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사그라진 시선들에 그나마 빵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방으로 돌아와 오늘 계획을 짜고 가이드북도 알차게 찍어두었다. 이런저런 검색을 해보고 숙소를 나오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갔다. 분명 일찍 일어난 것 같았는데 계획을 하는 것에 만만찮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마음 편한 원데이패스를 끊고 열차를 기다렸다. 다시 그 미니미니한 열차를 타고 30분 정도를 달려 코블렌츠로 향했다. 이곳에서 열차는 마치 한국의 시외버스 같은 느낌을 준다. 마을 내부는 트램이 돌고 조금 구석까지 도는 게 버스라면 도시와 도시를 이동할 때는 열차가 기본이다.
시끌벅적한 학생무리들과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나도 모르게 도착한 줄 알고 일어날뻔했다. 군중심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5분 정도 더 가자 내가 내릴 역이 나왔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추천받은 젤라또 집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을 향해 부지런히 발을 놀리다 커다랗고 복슬복슬한 개를 만났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주인공이 되어있길래 슬쩍 끼어들어 사진을 요청했다. 견주아저씨의 흔쾌한 허락에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코블렌츠 구시가지를 가로질렀다.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들도 예뻤지만 나의 목적지는 '도이치 에크'라 불리는 독일판 '두물머리'였다. 직역하자면 독일의 모서리라 불리는 이곳은 강 두 개가 합쳐지는 부분에 진짜 모서리처럼 툭 튀어나와 위치해 있다.
물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데 짠내가 하나도 나지 않는 게 생소했다. 제주도 촌 것은 육지에만 가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대륙을 건너 독일에 와서 경험한다. 기대한 것보다 조금 별로이기도, 조금 더 신기하기도 하다.
이틀 동안 한국어를 안 써서인지 입에 거미줄이 쳐진 것 같다. 말을 해도 딱히 통한다는 느낌이 없으니 속이 답답하다. 나는 하루라도 대화를 하지 않으면 입이 마르는구나, 스스로가 수다쟁이란 것을 새삼 느낀다.
코블렌츠의 온 또 다른 목적인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로 가기 위해 12유로라는 거금(!)을 주고 케이블카와 요새의 통합권을 샀다. 요새는 그 역사를 따지자면 기원전 로마 군사요충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요새화가 된 이후부터는 일부는 파괴되었을지언정 단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군사시설이라기에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케이블카를 타며 도이치 에크를 위에서 다시 한번 구경했다. 셀카가 너무도 낯설고 민망한 나 대신 귀여운 고양이 인형으로 인증샷도 남겼다. 풍경을 구경하는 사이 요새의 끝에 다다랐다. 과연 높고도 넓어 '요새'라는 단어가 한 번에 이해되는 장소였다.
일부는 유스호스텔로, 일부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요새는 진짜 넓었다. 천천히 구경을 하는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음악소리와 사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은은히 울리는 병장기소리에 혹시나 행사를 하는가 싶어 부리나케 발을 옮겼다. 그러나 걷고 또 걸어도 중심부는 나오지 않고 소리마저 계속 커졌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30분 정도를 돌아다닌 후에야 소리는 그저 분위기 조성용 BGM이란걸 깨달았다.
약간은 허무했지만 그래도 소리의 근원을 찾겠다고 멋있는 건물을 쏙쏙 잘도 구경했다. 박물관에서는 미술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미술에는 큰 조예가 없어 예술적 의미는 모르겠고 그저 신기하고 예뻤다.
요새의 하이라이트는 성벽에서 바라보는 코블렌츠 시내였다. 가까이에서는 잘 안 보이던 도이치에크의 구분선도 위에선 뚜렷하게 보였다. 하나도 읽지 못했던 독일어들을 지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떨어질듯한 불안감은 단단한 벽돌로 막히고 길을 잃은듯한 걱정은 탁 트인 시야에 먹혀버린다. 두 개로 갈라지고 하나로 합쳐지는 강을 보는 순간 불안이 기쁨으로 바뀐다. 열린 시야가 너무 좋았다. 유리창으로 가려지고 시멘트 건물 속 갇혀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 옛날부터 서있던 요새에서 바라보는 전경이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늦지 않게 숙소로 돌아가는 열차를 탔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하도 빤히 바라보기에 짜증이나 나도 똑같이 바라봐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그 남자가 어제 나에게 열차를 알려준 사람이란 걸 기억해 냈다. 흔치 않은 동양인이 이틀연속으로 보이니 신기했나 보구나 싶었다.
숙소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근처 마트에 들렀다. 낮시간동안 햇볕을 오래 쐬었는지 시원한 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마트풍경을 구경하다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맥주 한 캔을 골랐다.
계산대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생애 첫 맥주 구매에 잘못한 것도 없이 떨고 있을 때 앞을 지나가던 아저씨 한분이 물건을 떨어트렸다. 반사적으로 주워 건네자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알 수 없는 독일어지만 Dank(고마워). 만큼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색한 웃음에 아저씨도 따라 웃어주고는 지나가셨다.
맥주를 올려놓자 캐셔분이 계산을 해주셨다. 소심하게 나도 따라 Vielen Dank(감사합니다)를 내뱉어보았다.
나의 유럽여행은 건질만한 사진이 많지 않았는데 요상하게 이날은 사진이 (주관적 기준) 괜찮아 보인다.
엉망인 심령사진들 사이에서 형태를 갖춘 서너 장을 자랑삼아 첨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