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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Aug 31.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08

길이 있다는 걸 알기에 잘못된 길을 간다

2016.09.14

Köln, Deutschland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쾰른으로 이동하는 아침이 밝았다.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정이 들었다. 사람에게도 정이 들지만 공간에게도 정이 든다.

 익숙해진 잠자리, 의자, 거리와 행인들. 욕심내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하나씩 다시 욕심이 피어오른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렇게 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계속해서 찾아오는 후회를 피하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다양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금세 그들의 흔적이 희미해지는 곳이지만 내가 이곳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관광객들 사이에 껴 열차에 올랐다. 공항역에서 한차례 썰물이 지나가듯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눈이라도 붙일까 싶었지만 긴장된 몸은 또렷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휙휙 지나는 풍경을 보다 보니 목적지가 가까워진다.

 오늘의 일정은 조금 빡빡했다. 아침에 프랑크푸르트 숙소를 나와 쾰른으로 이동하고 2시간 정도 시내를 구경한 뒤 코블렌츠로 이동해 그곳에서 숙소가 있는 베드에센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특히나 베드에센으로 가는 열차는 하루에 몇 편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라도 환승이 어그러지면 제시간에 숙소를 못 찾아갈 수도 있었다. 


 쾰른 중앙역에서 내려 캐리어를 보관하러 락커로 향했다. 주욱 늘어져있는 락커는 많았지만 내 캐리어가 들어갈만한 사이즈의 빈칸은 얼마 남지 않았었다. 부랴부랴 짐을 넣으려 하는데 라커가 돈을 먹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라커는 5유로 지폐를 뱉어내고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다른 지폐를 넣으려 해도 내가 가진 5유로 지폐가 한 장뿐이라 계속 같은 지폐로 락커와 싸우고 있었다.

 세 번쯤 락커가 돈을 뱉었을 때 나를 쳐다보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도와줄까?"

 격렬하게 끄덕이는 내 고개에 아저씨는 내 지폐를 대신 받아 넣어주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라커는 돈을 다시 뱉어냈고 아저씨는 자신의 지갑에서 5유로짜리를 하나 꺼내 들었다.

 "같은 돈이야. 맞지?"

 앞뒤로 확인까지 시켜준 아저씨는 새 지폐를 락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락커가 작동되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락커는 두어 번 더 돈을 뱉어냈다. 퉤.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저씨는 계속되는 실패에 조금 초조해 보였고 나는 아저씨가 그냥 갈까 봐 불안했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는 두 명의 불안한 인간은 기계를 버리고 원초적인 방법을 찾아내었다. 바로 역무원을 찾아간 것이다! 다행히 쾰른은 관광객이 많이 오는 도시였고 유인 보관함도 운영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를 보관소 앞으로 데려다주고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나는 4유로에 내 짐을 맡길 수 있었다. 사람 만세!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쾰른 대성당을 찾아 나섰다. 높고 커다란 고딕성당은 멀리서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입구를 넘었다. 빛을 머금은 스테인글라스가 가득했고 왜 '대'성당(원어: Köln Dom)이라 이름 붙었는지 이해가 가는 내부가 펼쳐졌다. 웅장하고 우아하지만 내가 찍은 사진들은 심령사진처럼 나왔기에 그나마 건진 두 개의 사진을 하나는 커버에, 하나는 밑에 첨부한다.

아래 두 사람이 서로 쳐다보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스테인글라스를 그 자체도 좋아하지만 그곳을 투과해 나온 빛을 더 좋아한다. 태양이 색유리를 넘어오며 가져온 다채로운 그림자들이 예쁘다 못해 신비하다. 한참을 구경하다 보면 머리를 뒤엎던 생각들이 차근히 정리된다. 내가 본 색그림자(나는 스테인글라스를 통과한 빛을 이렇게 부른다.) 중 제일은 바르셀로나에 있지만 쾰른역시 아주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지 않은 그림자가 있었던가? 편애가 가득한 감상이지만 나는 색그림자가 아름답지 않은 성당은 아직 보지 못한 듯하다.


 성당을 한 바퀴 돌고 호엔촐레른 다리를 산책했다. 주렁주렁 매달린 자물쇠들이 시선을 잡아챈다. 시간 관계상 박물관도, 미술관도 다음기회로 미뤄두고 다시 성당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조금 이른 일기를 적고 잘생긴 사제들이 걸어 다니는 걸 구경했다. 

 약간은 부산스럽고 웅성이는 소리가 건물을 채웠다. 일기는 다 적었다 생각했는데 괜히 글을 이어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나서면 여행의 기대도, 설렘도 없어지고 눈앞의 불안이 선명해진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달랬다.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잘못된 길을 가고 도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한다. 나는 언제나 길을 잃고, 두려워하고, 외로워할 테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길을 찾으려 하는 본능이, 욕망이,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가 있다. 내가 넘어져도 잡아줄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어딜 가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나를 강하게, 용기 있게 만든다. 

 (중략)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안식과 위안을 받아간다. 하지만 난 이 돌덩이들 사이에서 고민을 얻어간다. 아니라고 부정해 보지만 작은 가시에 찔린 듯 따끔하다.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고 되새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러지 않았을까. 누구도 나를 막지 않았다 변명하기에는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져야 할 나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선택을 한건 나다. 아니라고 고개 저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겁쟁이에, 쫄보에, 뭐 하나 시도하기 두려워하는 소심쟁이다.

 여행을 마친다고 커다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내 인생이 확 바뀔 거라 믿지도 않는다. 그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니까. 그냥 그저, 조금 더 용감해지고 싶다.


 무거웠던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중앙역으로 향했다. 짐을 찾고 다음 열차 플랫폼을 찾아갔다.

 이제부터는 인문학적 사유를 빙자한 자책을 하기에는 너무나 긴장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혹시나 열차를 놓칠까 몇 번이고 플랫폼을 확인하고 티켓을 확인했다. 그러다 보면 독일의 고질병이 또 터진다. 연착이다.

 이럴 줄 알고 넉넉하게 이른 시간의 열차를 잡은 거지만 마음이 불안 해지는 건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다. 타야 할 열차가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 무사환승을 기원했다.


 다행히 예상시간보다 크게 늦지 않고 역에 도착했다. 지친 마음에 자판기에서 젤리나 사 먹으려 했는데 기계가 돈을 먹고 물건을 주지 않는다. 오늘은 무슨 날인 걸까. 기계의 반란인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허허로이 웃었다. 내 옆에 차례를 기다리던 백인 언니가 이상하게 쳐다보다 돈을 넣었다. 그렇게 그 언니도 내 옆에서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저 멀리 내가 돈을 넣을 때부터 눈치 보던 남자도 고개를 젓는 것이 저 놈도 뜯겼구나... 싶었다. 독일은 열차 적자를 이렇게 메꾸는 것일까? 


 환승해야 할 열차가 도착하자 너무나 미니미한 열차 사이즈에 당황했다. 이게 맞는 열차일까? 깊게 고민하기도 전에 출발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서둘러 열차에 들어가는 남자를 붙잡고 이 열차가 내가 타야 하는 열차가 맞는지 물어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타라 하길에 엉겁결에 따라 타 자리를 잡았다. 금방 문이 닫히고 역사의 풍경이 멀어진다. 와중에 또 한 커플이 자판기 앞에서 성을 내고 있었다. 못해도 저 자판기는 오늘 8유로를 벌었다.


 2량이 전부인 미니미 열차에 동양인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맞은편에서 콕콕 찔려오는 시선이 따갑다. 슬쩍 쳐다봤더니 아까 열차를 타라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목 끝까지 '뭘 봐'가 차올랐지만 소심하게 입을 닫았다.

 작은 역사에 내려 숙소까지 캐리어를 끌었다. 완만한 언덕은 참을만했지만 평지의 돌바닥은 손목부터 어깨까지 온몸을 탈탈 털었다. 겨우겨우 숙소를 찾아 들어가니 나를 반기는 거라곤 텅 빈 창구와 독일어로 된 안내문, 그리고 전화번호 한 줄이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듯한 호텔은 립셉션이라해도 입구와 문너머 계단사이 마치 옛날 버스표를 사던 창구처럼 창 하나가 다인 곳이었다. 

 처음에는 잠깐 자리를 비었다 생각했다. 예약사이트의 창구 체크인 시간은 오후 3시부터 6시였고 몇 번을 확인해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을 쳐봐도 오지 않는 사람에 혹시나 싶어 안내문을 번역기에 돌려보니 체크인이 필요하면 전화를 하라고 적혀있었다.

 이제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좀 더 의연할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눈앞이 새까매졌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유심을 살 때 통화가 안 되는 옵션을 선택한 게 너무 후회스러웠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몇 분이나 통화할 수 있는지 몰랐다.) 막막한 마음에 어제 프랑크푸르투 투어를 진행해 준 가이드님께 무작정 연락했다. 가이드님은 불쑥 들어온 연락에도 친절하게 달래주고 위로를 전해주었다. 그 톡을 부여잡고 괜찮을 거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러는 사이 독일 숙박객이 들어왔다. 부부로 보이던 둘은 안내문을 보고 통화를 걸기 전에 나를 아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셋 다 영어를 썩 잘하지는 못했던 터라 겨우 상황을 공유했다. 부부는 전화를 걸어 주인과 통화하고 나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hallo? I can't speak german."

 받자마자 외친 문장이 어떻게 전해진 것인지 이미 너절해진 나의 귀에 들려오는 독일어에 다시 한번 비명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I CAN NOT speak german!"

 "Oh."

 그 오,라는 감탄사 뒤로 이어지는 영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얼마나 안심됐는지! 통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길게 늘여진 기다리란 말을 듣고 부부에게 전화를 돌려주었다. 두 명의 독일인들은 금방 전화를 끊고 알아서 자신들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는 둘이 너무도 부러웠다. 독일여행을 하며 간단한 독일어라도 배워둘걸. 하다못해 비싸더라도 쾰른의 시내에 자리 잡을걸. 부러움에 가득 찬 나를 두고 부부 중 남편이 말을 꺼냈다.

 "Bad, very bad hotel"

 위로가 되긴 했다.


 호텔의 주인은 6시가 넘어 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원래 이럴 때도 있다며 여권을 받아가 숙박부를 썼다. 웃는게 겸연쩍게 보였지만 썩 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지친 나는 얼른 씻고 눕고 싶었다. 한 시간 전에 독일부부가 사라진 계단 위를 주인을 따라 올랐다. 한층 정도 올라가니 뒤쪽으로 이어진 건물들이 보였다. 앞에서는 작아 보였는데 오밀조밀 들이찬 게 신기했다. 그중 가장 오른쪽 방이 나의 방이었다. 이미 열쇠가 꽂혀 열려있던 방은 트윈룸에 욕실까지 딸려있었다. 한 층만 오르면 침대가 있었는데 말을 못 해 한 시간이 넘게 계단 앞에 쪼그리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썩 훌륭한 방은 아니었지만 트윈을 혼자 쓴다는 점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배드버그를 확인하고 잠을 잤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해지기 전에 머리 누일 곳은 찾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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