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휴식
2016.09.10
Frankfurt am Main, Deutschland
어제의 실수로 넝마가 된 정신을 숙소 사장님의 컵라면 적선과 숙박객들의 위로로 조금 꿰매었다. 너무 크게 데여서인지 멀리 나가는 게 겁이 나고 멍청비용이 아까워 배가 아프기도 했다.
오늘은 천천히 시내를 좀 구경해 보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을 보고 마인강에서 바람이나 쐬자 싶었다.
밀린 피로를 잠으로 푼 덕분에 점심때가 되어서야 숙소를 나섰다. 20분 정도를 걸어가 성당을 구경했다. 웅장하고 우아했다. 아름답다는 감상과 동시에 만약 신이 있다면 정말 바쁘겠구나 싶어졌다. 여기도 저기도 '신의 집'이라 칭하는 건물들이 널려있는데 그 모든 곳에 신이 존재한다면 정말 정신없겠다 싶었다.
무교집안에서 자라서인지 종교와 그 부산물들은 참으로 신기했다. 어릴 적에 절도, 교회도 다녀봤지만 신을 믿거나 신앙을 가지는 것보단 같이 가는 동행이 좋아서, 가면 떨어지는 장난감이나 과자등의 콩고물이 좋아서 갔던지라 그때에도 '신실한' 사람들을 꽤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제는 나름대로 내 가치관이라는 게 생기고 학문의 관점으로 바라본 종교는 꽤 흥미롭지만 여행할 때만 해도 나는 종교라는 관념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성당에 앉아 기도할 때면 나는 신을 믿고 싶어 졌다. 옆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고 경배하는 그들이 신기했다. 한편으론 전지하고 전능하여 나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다 나는 그냥 내가 외로워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싶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거구나' 싶어졌다. 어쩌면 저들도 비슷한 마음으로 찾아오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성당에 들어가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신에게 거는 혼잣말과 스스로의 생각 정리를 위한 혼잣말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기도였다. 진짜로 신이 그 기도를 들었다 하더라도 '얘는 날 메모장으로 쓰는가 보구나.' 하고 지나갔을 듯했다. 엉터리 신자였지만 외관만은 그럴싸했던지라 다행히 쫓겨나지는 않았다. 이 영광(?)을 급식실에서 매번 성호를 그으시던 초등학교 선생님께 돌린다.
엉터리 기도를 마치고서는 마인강변을 따라 걸었다. 한강과 비교해보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한강을 가본 적이 손에 꼽았기에 그저 '둘 다 흙탕물이구나~' 하는 공통점만 찾아냈었다.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고이 모셔온 매트를 잔디밭에 펼쳤다. 강변 풍경을 바라보며 하나씩 생각을 정리했다.
유럽여행의 목적은 "휴식"이었다. 지친 나의 심신을 달래기 위한 휴가였다. 동시에 쉽게 오기 힘든 장소였고 내 노동의 대가를 소모한 기회였다. 더 많이, 온 김에 모든 걸 보고 가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과욕이란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하루에 하나씩. 그 하나가 공원이 될 수도 도시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작은 드럭스토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엄청나게 화려한 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씩만. 나는 여유롭게 그 하나를 보고 싶다.
못 보면 어때, 다음에 또 오지 뭐. 못하면 어때, 다음에 또 하지 뭐.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라고 말하지만 때론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할 때도 있으니까.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이곳을 천천히 바라봐보자, 편하게 그곳에 속해있던 사람처럼. 평소보다 조금 더 용기 내보지만 과욕은 부리지 말자. 나는 이곳에 놀러 왔고, 쉬러 왔다. 낯선 게 당연하다. 무서운 게 당연하다. 그래도 딱 한 발자국만 더 용기 내보자. 더 나아가보자.
이날의 일기를 다시 옮겨쓰면서 나는 자라지 않고 어려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때의 나는 지치고 두려웠지만 오늘을 보람차게 살만큼의 기대는 있었고 내일의 나를 위한 배려도 있었다.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오늘을 열심히 살만큼의 기력도, 내일의 나를 위한 기대도 없다. 지독하게 찾아온 무기력을 어떡해야 하는 건지 이제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몇 년이고 미뤄둔 8년 전 여행기를 다시 꺼내 들어 이곳에 옮겨 적는다. 다시금 내일을 기대하고 꿈꾸고 살아갈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