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국인에게 변화를 준 장소

한국 생활 2n년 차 외국인의 추억

by 라일라 메이

어린이대공원을 언급하는 에세이의 첫 에피소드에서 사진 동아리를 언급했다. 이번 에피소드는 그 동아리의 확장 이야기다. 어린이대공원처럼 가까운 곳에서 동아리 활동을 끝낸 후 선생님이 다음 장소를 알려주었다.


"애들아! 다음은 이화 벽화마을에서 할 거야!"


이화 벽화마을 그리고 나의 과거

고등학교 사진 동아리에 활동하면서 서울의 다양한 관광지를 방문했다. 어린이대공원에 가고, 북서울숲에 가고, 한강 근처에 가기도 했다. 동아리 활동하면서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딱 하나 있다. 바로 이화 벽화마을 또는 혜화 벽화마을이다.


다음 촬영 장소가 이화 벽화마을로 결정되었을 때 그곳이 과연 어떤 곳인가에 대한 호기심과 그 높은 언덕에 올라가야 한다는 귀찮음을 느꼈다. 심지어 이번 촬영은 사람이 중요해서 자연과 벽화만 찍으면 안 된다. 장소가 높은 언덕에 있지, 내가 등장하는 사진을 찍어야 하고 친구 대신에 사진을 찍어줘야 하지, 일기예보 보니까 그날이 더운 날이지. 이런저런 귀찮은 일이 예상돼서 짜증 내면서 사진 찍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내 예상과 다르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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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진 속에 넣기 싫은 이유

내가 사진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굉장히 어색했다. 처음에 뻣뻣한 몸짓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몸이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어색하고, 새롭고, 신기했다. 그리고 좋았다. 그 당시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몰랐다. 어른이 된 내가 그 일을 떠오른 후,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재미를 느꼈구나.'


그동안 소품과 자연만 이용해서 내 정신세계를 표현했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을 가지고 내 정신세계를 표현할 줄 몰랐다. 내가 왜 그랬는지 한번 생각해보았다. 생각한 끝에 이유를 내 정신세계 속에 찾았다. 고등학교 때의 정신세계가 이랬다.


'한국 문화에 익숙해진 외국인'

'모두가 인정한 한국인 같은 외국인.'

'고향에 가도 외국인, 한국에 가도 외국인.'


나는 고등학교 때 한국인 같은 외국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친구들도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었다. 그래서 내가 고향을 언급하면 '갑자기 왜 낯선 나라를 언급하지?'하고 의문을 품다가 3초 후에 웃기도 했다. 그 정도로 모두가 인정한 한국인 같은 외국인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다른 말로 소속감을 느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배경 속에 내가 등장하는 사진을 찍으면 그 소속감이 깨진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난 고등학교 때 소속감 결핍에 시달리고 있어서 내가 속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고향이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나는 고향에서 외국인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국 문화보다 고향 문화가 더 어려웠다. 심지어 필리핀어를 할 수 없어서 고향 사람들 사이에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이런 정신세계를 가졌으니 나는 내가 등장하는 사진을 보기 불편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꽃밭이 온통 장미꽃인데 그 사이에 백합 한 송이가 서 있는 기분이다. 눈에 띈다. 백합이 안 어울리게 장미꽃밭 속에 서 있다. 한국이라는 배경 속에 이국적인 외국인이 서 있다. 눈에 띈다. 외국인이 안 어울리게 한국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 최대한 '나'라는 사람을 배제했다.

다운로드 (1).jpg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 바닥에 앉은 외국인 학생

이화 벽화 마을은 잠시나마 소속감 결핍을 잊게 해 주었다. 내가 처음부터 그곳을 '나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 공간'으로 보고 있었는지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서 나라는 사람을 표현했다. 그래서 바닥에 앉기도 하고 그림에 어울리는 몸짓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양한 포즈를 취했을 때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 외국인 라일라가 아닌, 그냥 라일라로 보냈던 짧은 시간이었다.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다음 챕터에 변화가 생기는 법. 그런데 나는 다음 챕터에서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화 벽화마을 이후로 소품을 활용한 사진을 계속 찍었다. 그래도 그때 느꼈던 추억을 잊지 못했다.



이화 벽화마을 그리고 나의 현재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우리 이화 벽화마을에 가서 교복 체험하러 갈까?"


그 높은 언덕에 가서 벽화 보러 가자는 제안을 들으면 바로 거절당할까 봐 늘 '교복 체험'이라는 두 단어를 붙어서 말했다. 다행히 교복 체험 덕분에 이화 벽화마을로 가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봄, 여름, 가을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이화 벽화마을에 갔다. 학창 시절에 진짜 교복을 입고 촬영했다면 현재는 '옛날 교복'을 입고 촬영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몰랐다.


'어? 거의 다 교복 사진이네? 과거도, 현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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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화 벽화마을에 가면 빠짐없이 교복 체험을 했다. 내가 작정하고 교복을 입은 것이 아닌데. 그동안 이화 벽화마을을 방문한 기억을 떠오르니 모두 교복 체험을 한 기억뿐이다.


현재 사진들을 보면 내가 예전보다 솔직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찍을 때 머뭇거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교복 입고 벽화 사진을 찍었을 때 '학창 시절'이라는 테마에 맞게 피아노 앞에서 찍고, 일부로 책을 들고 독서하는 모습도 찍었다. 교복을 반납한 후, 사진 촬영이 계속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이화 벽화마을의 가게들 구경하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테마 가게를 방문했다. 가게 주인의 허락을 받아 소품을 가지고 촬영했다. 사진을 보자마자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했다.

이 사진의 제목은 화이트 여왕과 하트 여왕이다. 하얀색 왕관을 쓰고 봉인당한 순수한 여왕을 연출한 후 검은색 왕관을 쓰고 봉인 해체된 여왕의 모습을 표현했다. 고등학교 때 찍었던 사진과 비교하면 많이 발전한 표정이었다. 마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과거의 나는 왕관을 쓰고 눈을 감고 있다면 현재의 나는 왕관 쓰고 당당하게 웃고 있다.

내가 확실히 변했다.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수준까지 갔다. 만약 부끄러움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사진을 브런치 글에 올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재밌는 포즈가 담긴 사진을 소장용이 아닌 많은 사람이 보는 브런치에 공개하는 것. 내가 변했다는 증거다.


'난 이 배경 속의 외국인이다!'


나는 이제 당당하게 사진을 찍는다. 한국이라는 배경 속에 '나'라는 외국인. 장미뿐인 꽃밭에 서 있는 백합은 이제 자기 자신을 마음껏 뿜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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