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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비 Jan 04. 2024

우중 축구

2023.09.25


수요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공식은 깨지고 말았다

  축구하는 수요일. 지난 수요일은 일기예보 상으로 이미 비가 확정이었다. 호우 경보 문자가 지치지 않고 핸드폰을 울렸다. 창단 이래 수요일은 비가 오지 않았음이 하나의 자랑과도 같았던 축구단에 도래한 첫 위기였다. 지지난 주 수요일 경기를 마칠 때쯤 비가 쏟아졌던 것을 제외하고, 여태껏 반년 가까운 기간 동안 비를 맞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난 화요일까지는 정말로 신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날이 밝아 수요일이 되었을 때는 이 전례 없는 상황에 대처를 해야 했고, 경험 부족은 고스란히 약점이 되어 남았다. 비가 와도 축구를 하는 것일까? 모임은 취소가 되는 것일까? 모두 궁금해만 할 뿐 누구도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러던 오후 3시경, 수석 코치님은 비가 와도 수중전 훈련 모드로 진행해 보시겠다며, 다만 개인 타월을 하나씩 지참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밴드에 글을 올리셨다. 그로부터 30분 뒤, 회장 언니는 6시까지 기다려 보다 비가 많이 오면 안전을 위해 모임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드센 분들의 기를 모아보자며 농담 섞인 한 마디를 단톡방에 남기셨다. 과연 아줌마들의 기운을 모아 비를 멈추는 주술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인가! 축구장에 모이는 시간은 7시. 그전에 넉넉하게 도착하려면 집에서 6시 30분에 출발해야 한다. 나는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이제 밥은 꼭 먹고 간다.) 유니폼을 갈아입고서 6시부터 취소 연락을 기다리며 대기했다. 창밖을 보니 비는 이미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30분간 단톡방이 잠잠하여 집을 나서보기로 결정했다. 취소 연락을 기다릴 때 이미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 앞뒤가 안 맞기는 하다. 아무래도 나 역시 몰래 기를 모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올여름에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았던 비치타월을 챙겨 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운동장에 도착하니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이후로 다시 내렸다 그쳤다 반복) 벌써 출석한 단원들도 몇 보였다. 비 때문에 망설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단원까지 합해서 모두 11명이 출석했고, 결과적으로 평균 출석률은 반 토막이 났다. 그러나 지난 수요일에 운동장으로 모인 11명은 실력 아닌 열정으론 베스트 일레븐이었다. 여성 축구단 담당 코치님(이하 이을용 코치님. 왜냐하면 이을용 닮음)은 비가 내릴 때 볼 컨트롤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으로 훈련을 개시하셨다. 이어서 두 조로 나뉘어 패스 훈련 시간을 길게 가졌다.


보통 유소년 축구단과 여성 축구단이 운동장을 나누어 쓰는데, 역시 비가 와서인지 아이들은 모두 돌아가고 없고 유소년 코치님(이하 김민재 코치님. 왜냐하면 김민재 닮음)만이 남아 계셨다. 김민재 코치님은 유소년 축구단 훈련이 먼저 끝나면 우리 쪽으로 오셔서 경기 중에 멀리 흘러간 볼을 주워다 준다든지 하는 크고 작은 도움을 주시던 분이다. 지난 수요일에는 애초에 아이들이 가고 없으니 작정하고 우리 훈련을 도와주셨다. 선생 대 학생 비율이 1:5.5로 맞춰지자 학습 효율이 월등히 좋아졌다. 비가 내린 덕분에 얻는 혜택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민재 코치님은 이을용 코치님에 비해 조금 더 엄하셨다. 키가 크신 만큼 목소리는 저음이었고, 그 목소리로 던지는 피드백은 날카로웠다. 공을 찰 때 발목이 덜렁거린다, 골반이 자꾸 틀어진다는 피드백을 처음 받고선 감사했다. 두 번 세 번 반복이 되자 나는 점점 위축되고 말았다. 피드백을 받고 습관을 재빨리 고치기엔 몸이 너무 굳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나도 알지만 어찌해도 안 되는 그 느낌.


여자들도 초등학교 체육 시간 때부터 공 차는 기본적인 방법이라도 배웠으면 어땠을까? 점심시간에 원하는 사람은 남자 애들 사이에 껴서 같이 축구를 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후에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김민재 코치님도 그다지 무섭게 코칭을 하신 것은 아니었다. 비교 대상이 친절한 이을용 코치님이어서 그랬지. 익숙함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드리블 훈련 후 경기를 뛰려는데 출석 인원은 11명뿐. 홀수라 짝이 맞지 않아서 김민재 코치님을 포함시켜 6:6으로 팀을 나누었다. 우리 팀에는 최연장자 언니, 호통 언니, 드리블러 언니, 포용 언니, 골키퍼 언니가 있었다. 호통 언니는 첫날, 첫 경기에 같은 팀이 되었을 때, 실수를 한 내게 호통을 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언니다. 포용 언니는 2주 전에 같은 팀이 된 적이 있는데, 포용력과 리더십에 유머 감각까지 갖추어서 깊은 인상을 남긴 언니다. 포용 언니가 직전 주에 결석을 하신 것이 내가 리더십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듯, 호통 언니도 포용 언니가 발산하는 태양광은 막지 못하였다. 상대팀에 우리 축구단의 절대 지존 에이스가 있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세 골을 내주고 있는 상황이었지만,(결국 상대팀의 골키퍼를 맡던 김민재 코치님과 우리 팀 골키퍼 언니를 맞 트레이드하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우리 팀은 기죽지 않았다. 통상 세 팀이 두 경기씩, 전후반 10분씩을 뛰는 거였는데, 이번엔 단 두 팀뿐이라 전후반을 15분씩 늘려 뛴 것이 체력을 떨어트렸을 뿐. 10분씩 전후반을 소화하던 단원들은 후반전으로 갈수록 급격하게 한계치에 다다랐다. 다시 한번 익숙함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의 포지션은 최후방 수비수였지만, 골 넣는 수비수가 되라는 주문이 더해졌다. 따라서 우리 골대 앞에서 상대 골대 앞까지 종횡무진해야 했고, 눈알을 굴려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기 바빴다. 최전방 공격수 최연장자 언니에게 골을 넣을 몇 번의 기회가 주어졌었지만 그의 킥은 골로 연결되지 못하였고, 골 가뭄은 점차 심해져 갔다. 수비를 맡은 터라 골 욕심이 전혀 없던 나는 점점 이대로 있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아웃라인에서 패스받은 공을 다른 팀원에게 패스하지 않고 직접 골대로 차 보았다. 그리고 공은 그대로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GOAL!


첫 번째, 두 번째 출석에서 넣은 골들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게 대부분이라 넣고도 어딘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이번에는 공이 내 발에 떨어진 것을 알고, 보고, 조준하고 찬 것이라서 의미가 달랐다. 스스로도 굉장히 뿌듯했을 뿐 아니라 포용 언니도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은 내가(우리 수준의 중거리 슛이다. 실제 중거리가 아님을 강조한다.) 정말 멋있었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팀은 지고 말았지만, 출석한 11명 모두는 빗속에서 축구를 한 우리 모습에 한마음으로 자긍심을 느꼈다.


달리기를 3년 넘게 하면서 나는 땀에 대한 불편감이 어느 정도 극복된 것 같다. 전에는 그런 생각도 해보지 못했는데, 축구를 시작하고 훈련하는 중간에 아직 땀에 대한 불편감을 극복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보이기에 깨닫게 된 사실이다. 땀으로 몸을 적시고 옷을 적시며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한 일말의 거부감이 여자들의 마음속엔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비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비까지 맞으면서 땀 흘리고 운동하기는 싫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리하여 더더욱, 열정 베스트 일레븐은 지난 수요일의 경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껍질 하나를 깨고, 계단을 한 단 넘어선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다가오는 축구하는 수요일은 추석 연휴 하루 전이다. 우리네 아줌마들에게는 비 보다도 무서운 명절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수요일도 우리 축구단은 훈련과 경기 일정을 취소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레벨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떼로 모일 수 있어 행복하다는 감정이 피어오른다. 따뜻한 곳에 들어가 비를 피할 때 젖은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우중 축구 후 포용 언니가 쏘신 커피와 차를 나눠 마시며 너 나 할 것 없이 쿠웨이트 전 백승호 선수의 골을 칭찬하는 이 모임. 눈치 보지 않고 축구 얘기를 할 수 있는 이 모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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