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4
아이들 등교, 등원시키는데 꽤 힘에 부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수요일이라서 그런가? 이래서 프랑스 놈들이 수요일에 쉬었나? 똑똑하다. 난 수요일에 못 쉬는 한국 놈이지만 다행히 무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축구. 저녁에 축구하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테니스 치는 친구가 라켓에 공이 딱 딱 맞을 때 스트레스 풀리는 느낌이 좋댔는데, 축구를 할 때도 발에 공이 착 착 달라붙어서 뻥 뻥 차질 때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축구를 하러 가야만 했다. 다만,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 불안 초조했다. 기상청의 열일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비는 미스트처럼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도착하고 비는 잦아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 어제는 행복 축구가 되지 않았다.
점심을 많이 먹은 탓에 저녁에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다. 밥을 안 먹고 가서 그런 걸까, 경기 중에 달리는데 힘이 안 받쳐주는 느낌이 든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다, 경기 치르기 전에 드리블 훈련을 하면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치기 시작했는 지도 모르겠다. 인생 대부분을 우등생으로 살다가 지진아가 된 기분이었다고 할까,라고 쓰려고 보니 실제로 내가 대부분의 인생을 우등생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으므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그래, 축구공 드리블 안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답답한 상황들도 겪었었지. 일단 웃기니까 웃자. 드리블은 연습하면 늘 수 있다.(쓰다 보니 희망이 솟는다) 아무튼 어제에 한해선, 행복 축구를 이루기에는 몸과 마음이 쌍방으로 영향을 끼치며 서로를 무력하게 했던 것이다.
오욕의 드리블 훈련이 끝난 후 경기를 치르기 위해 팀을 나누었고, 한 팀이 된 단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구성이 나쁘지 않았다. 매 경기 골문 앞에서 위협적인 몸놀림을 보여주는 언니, 지난주 경기에서 득점을 한 언니, 처음 출석했지만 밸붕인 언니도 같은 팀이다. 모두들 착하고 배려심이 넘친다. 다만 우리에겐 한 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리더십의 부재였다. 피치 위의 권력은 실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시뇨리티 Seniority (쉽게 말해 짬밥). 경기 시작 전 잠깐의 말미 동안, 상대 팀에 누가 있는지 파악 후 누굴 집중적으로 마크할 것인지가 골자인 간략한 작전을 짜고, 포지션을 배분해야 하는데, 우리 팀에는 나서서 그 일을 정리할 사람이 없었다. 구호를 만들고 파이팅을 유도하는 사람도 없었다. 실력도 없고 짬도 안 되는 나는 피치 위의 쩌리로서 명령을 하달받고 거기 따르는 게, 다들 마다하는 포지션을 맡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러나 어제는 실력과 짬 중 하나라도 가졌다면 내가 어떤 발언이라도 했지 싶은 쬐끔 갑갑한 상황이었다. 포지션을 정할 때 다들 골키퍼를 꺼리고 폭탄만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공만 좀 더 잘 차면 "그 골키퍼, 제가 할게요~!" 할 텐데 난 그것도 못해, 아무것도 못해, 시키는 것도 근근이 해낼까 말까인데, 달리는 것조차 잘 안되고. 새삼 토트넘 핫스퍼와 국가대표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손흥민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첫 경기를 1-2로 지고 두 번째 경기 시작 전에는 다 같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손을 겹쳐 모으고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나는 골키퍼를 자처했다. 공을 잘 못 차니까 골킥은 무조건 손으로 던지겠다 선언하고 시작했다. 다행히 팀원들이 볼 간수를 잘해서 공은 내가 지키던 골문 앞까지 몇 번 오지 않았다. 그런데 골킥으로 공을 서너 번 던져 보니 이놈의 축구공은 왜 던지는 것도 쉽지가 않은 건지. 학창 시절 피구할 때처럼 그렇게 던지면 되겠거니 했으나, 피구 할 때 쓰던 배구공과 축구공은 성질이 달랐다. 코치님이 셋까지 세기 전에 던져야 하는데, 상대 팀을 피해서 우리 팀 발밑에 걸리도록 던져야 하는데, 발로도 못 차는 공을 손으로도 못 던진다. 어휴.(어쩌면 우리 팀의 치명적인 결점은 나?) 필드에서 뛴 팀원들의 선전으로 경기는 1-0으로 이겼다. 종료 휘슬 소리와 함께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치를 한 경기가 남아있었지만 해산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비까지 내리니 기분이 더 처진다.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앞에 좌우로 바삐 움직이는 와이퍼가 내 마음도 좀 닦아주었으면 싶다. 수년 전에 첫째가 하는 틈에 껴서 지문 검사라는 걸 받았었다. 그때의 결과에 따르면 내 손가락 지문 열 개 중 아홉 개가 이성이고 한 개는 더블 감성 이랬다. 어제는 매일 이어지던 이성의 날들 가운데 불현듯 찾아온 더블 감성의 날이었던 건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별일도 아닌데. 시뇨리티는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이지만, 실력은 연습으로 다질 수 있는 일이다. 고로 연습만이 행복 축구(=행복 추구)의 길을 닦아 줄 수 있다. 리더십까진 무리이지만 스스로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을 만큼은 당당하고 단단한 실력을 가진 내 모습을 꿈꿔본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밥을 든든히 먹고 가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쏘니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두 유 노 쏘니? 두 유 노 클린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