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저번 편에 이어 약을 끊어가며 들었던 생각과 완치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려 한다.
약을 줄여가기 시작한 때는 병원을 꾸준히 잘 가고 있던 상태였고, 의사 선생님과의 신뢰관계도 많이 형성되었으며,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순 없지만 작은 문제가 있더라도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었던 때였다. 내가 약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지만 어느 순간, 그날이 찾아왔다.
평소와 같은 삶 평소와 같은 상담이라고 생각하던 와중, 갑자기 선생님은 이제 약을 줄여가 보는 게 어떠냐고 말을 꺼내셨다.
약을 줄이자고?!
약을 늘리는 건 오히려 약을 통해 상태를 나아지게 할 수 있으니 괜찮다는 느낌이었다면 약을 줄이는 건 상상조차도 어려웠다. 약을 먹어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거 아닌가? 약을 안 먹으면 또 그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닌가? 어떡하지? 성급한 결정이어서 내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물론 의사 선생님이 보는 내 상태가 더 정확하겠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앞섰다. 그랬기에 나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네? 왜요?!라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선생님은 냉철하게 지금 상태와 지속기간을 보면 약을 줄여가도 괜찮다고 생각된다고 대답하셨다. 근데 줄이고 싶지 않은데요?! 내 대답에 선생님은 "그렇게 걱정되시면 그럼 조금만 지켜보고 줄여가는 걸로 해보죠."라고 답하셨다.
집에 돌아가는 길. 상담내용이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내가 약을 줄여도 되는 상태인가? 물론 좋은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 정도로 좋아졌다는 이야기니까. 그렇지만 마음 한 구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어쩔 수 없었다.
2주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다시 약을 다시 줄이기로 한 날의 상담시간. 선생님은 이제 약을 줄여도 괜찮겠냐고 말하셨고 나는 결의에 차서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렇게 약을 줄이기 시작했다. 다른 얘기지만 이제 와서 보면 선생님은 명의인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아주 소량의 약을 줄이게 된 첫날, 물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며칠이 지나도 몇 주가 지나도 그냥 약을 먹던 것과 똑같이 생활이 가능했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그 뒤에 조금의 기간을 사이에 두며 점차 약을 줄여가게 되었고,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약을 줄여가는 것이 가능했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내 상태는 약을 먹지 않아도 약을 아주 많이 먹고 생활했던 것처럼 충분히 생활이 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더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때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와서는 행동치료 덕이었다는 것을 안다. 행동치료 광팬처럼 보이는 게 우습지만 원인과 결과를 따져 중간과정을 살펴보면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행동치료를 통해 약을 먹지 않아도 먹었을 때처럼 호르몬을 분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약을 줄여가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던 것이다.
그렇게 약을 줄여가다 보니 한 번에 열 개 넘게 삼켜야 했던 약은 하루에 겨우 세 개로 충분하게 바뀌었다. 최소량의 약만 섭취하는 기간이 꽤 길게 지속되었다. 그즈음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곧 약을 끊게 되겠구나. 하지만 약을 줄여가는 것까지는 해냈다 해도 약을 아예 끊는 것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약을 먹은 지 어언 3년 반을 향해가던 시점이었다. 이제 약을 먹는 것이 먹지 않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냥 약이 내 삶의 일부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약을 먹고 저녁에 자기 전에 약을 먹었다. 그게 이미 당연했다! 그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느낌과 아주 소량의 약이라 해도 약을 먹음으로써 나를 보조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안정감이 사라질 거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두려웠지만 결국 약을 끊는 날이 찾아왔다.
사실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약을 끊었다고 해서 우울증이 완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을 끊고 4주에서 8주가량은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 확실한 날짜는 몰라도 어쨌든 완치 판정의 바로 전단계에 들어서는 날이 오게 됐다.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앞에서 나는 괜찮을까요? 하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쩜 단호하게도 "괜찮을 겁니다."라 대답하셨다. 그 말에 걱정은 되지만 마음을 다시 잡고 병원 밖을 나서게 됐다.
약 없이 살아가는 나날들. 나는 너무 기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시나 샴페인을 빨리 터뜨렸다가 되려 속상하게 될까 봐. 나도 조심스러웠고 가까운 이들도 그러했다. 그렇게 마지막 경과까지 지켜본 뒤 2022년 4월 15일 병원을 찾았을 때, 선생님은 내게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첫 화에서 말했듯 나는 약을 끊어가며, 그리고 완치 판정을 받고 나서도 걱정이 앞섰다.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되며 만약 2주 이상의 우울을 경험한다면 다시 병원을 찾으라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하고 있는 선생님을 다시 볼 일이 없게 되는 게 이상했다. 매주 가던 병원이 2주에 한 번, 4주에 한 번 등으로 기간이 늘어났다 해도 영영 가지 않는 건 또 약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기분이었기에. 그동안 신뢰관계가 쌓였던 선생님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치가… 불안했다.
완치받고 두 달 뒤에 쓴 일기
일기에 썼듯이 완전히 완치라는 판정을 받았다 해도 불안했다. 언제든지 다시 재발할 것 같았고 내가 잘 살아갈 거란 확신 역시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1화에 말했듯, 충분히 기뻐하고 즐겼어도 됐다. 그 불안감에 온전히 내 판단만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나라는 완치의 예시가 이미 있으니 당신이 완치 판정을 받는 그날에는 꼭 힘껏 기뻐하셨으면 좋겠다. 내가 그러했듯 이 지리멸렬한 병이 끝나는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어느 날에는 별 문제가 없어지는 때가 오고 어느 날에는 더 이상 병에 걸린 상태가 아닌 때가 온다. 그 어느 날은 느리더라도 분명히 찾아올 수 있다. 이렇게 나의 길고 길었던 우울증 이야기가 끝났다. 다음부터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로 찾아오려고 한다. 그날까지 언제나 안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