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채원 Feb 25. 2021

입금은 아내를 춤추게 한다.

가끔은 행복


우리 부부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퀴즈도 내는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형식이 조금 바뀌었다.) 퀴즈를 맞힌 사람은 상금으로 100만 원을 받고, 틀린 사람도 선물을 뽑을 수 있다. 일단 아기자기 큰자기로 불리는 조세호와 유재석의 케미가 너무 잘 맞고, 시민들이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다가 웃다가 하게 된다. 토크가 끝나고 퀴즈가 나오면 떨리는 마음으로 같이 풀어보고, 퀴즈를 못 맞춘 출연자에게 주는 이색 선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둘이 같이 유퀴즈를 보고 있었다.


“2번! 2번이야, 확실해!”


아는 문제가 나오자 신나서 답을 외쳤다. 내 말대로 답은 2번이었고, 출연한 시민도 답을 맞히고 100만 원을 받았다.


“우와, 저 사람 진짜 좋겠다. 나도 길 가다가 유퀴즈 만나고 싶어.”

“유퀴즈는 순천에 안 와.”

“그치? 여기까진 안 올 거야.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100만 원 받을 자신 있는데.”

“틀려서 생선 슬리퍼 같은 거나 받아오지 마.”

“근데 나 방금 퀴즈 맞혔잖아. 100만 원 주라. 응?”

“그걸 왜 나한테 주라고 해?”

“유재석한테 주라고 할 순 없잖아.”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다 잠자리에 들었다. 며칠 뒤, 은행 어플을 켰는데 통장 잔액이 좀 많아진 것 같았다. 거래 명세를 보니 모르는 돈 10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한테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받을 돈이 없었고, 입금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다른 통장에 이체하려다 실수로 내 통장에 돈을 보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거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 일단 은행에 전화해서 이야기해 보기로 마음먹고 남편한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오빠, 누가 실수로 내 통장에 잘못 이체했나 봐. 100만 원이 들어왔어.”

“그거 내가 보낸 거야.”

“오빠가 왜? 근데 이름이 달라. “

“내가 보낸 거 맞아. 며칠 전에 유퀴즈 보다가 백만 원 주랬잖아. 그때 입금한 거야.”

“근데 왜 이름이 서재석이야?”

“유재석 말고 서재석”

“아ㅋㅋㅋㅋㅋㅋㅋㅋ”


별 뜻 없이 한 말을 새겨듣고 진짜 100만 원을 입금한 세심함, 돈을 보내 놓고도 며칠이나 티 내지 않은 진중함, 서재석으로 이름을 바꾼 재치, 내 남편이지만 정말 모든 게 완벽하다. 갑자기 왜 안 하던 남편 칭찬을 하냐고? 100만 원 받았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어제는 아침부터 남편이랑 싸웠다. 남편한테 아이들 좀 보라고 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데, 남편은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애들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 했다.


“오빠, 아솜이가 부르잖아.”

“응? 왜? 뭐? 왜 불렀어?”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서 남편한테 "무슨 생각을 하길래 바로 옆에 있으면서 대답도 안 하냐"고 화를 냈다. 남편도 왜 화를 내냐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고 결국 그렇게 둘 다 기분이 상했다.


점심때쯤 되자 남편이 은근슬쩍 다가오더니 미안하다고 먼저 말을 걸었다. 남편이 사과하는 순간 이미 기분은 풀렸지만, 괜히 새침한 척 튕겼다.


"사과는 돈으로 하는 거야. 미안한 만큼 입금해. 얼마나 입금했는지 보고 마음에 들면 사과받아줄게."

"만약에 마음에 안 들면 보낸 돈은 환불해줄 거야?"

"환불은 무슨 환불!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더 입금해야지."


남편이 돈을 보냈다는 말에 금액을 확인해봤다. 1052원이었다.


당신의 AI라니. 내 브런치 애독자 인정!



"이게 뭐야? 천오십이 원?"

"이거 몰라? 아.. 여보는 삐삐 세대가 아니지 참."


삐삐 암호는 8282(빨리빨리), 486(사랑해)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1052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일공오이?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일영오이? 이것도 아닌데. 숫자를 계속 째려봤더니 52가 하트처럼 보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10은 알파벳 lo랑 비슷하네?


"설마 love?"

"오, 역시 눈치는 빨라."

"10은 lo랑 모양이 비슷하고 마지막 2는 알파벳 e랑 발음이 비슷한데, v는 왜 5야?"

"로마자 5를 생각해 봐."

"아! 옛날 사람들은 사랑도 복잡하게 했구나. 어쨌든 액수가 마음에 안 들어. 탈락!"

"금액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잖아."

"1052 뒤에 하트 대신 0을 3개 정도 더 붙였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싸움은 끝났지 뭐. 부부싸움은 역시 칼로 물 베기 인가보다. 아무리 그래도 1052원에 넘어가기에는 조금 아쉽다. 오늘 밤에 애들 재워놓고 오랜만에 유퀴즈나 보자고 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