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행복
남편과 얼떨결에 소개팅하게 된 그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만나게 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간단히 전해 들었는데, 들을수록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 봐야 아나. 만나보지 않았지만, 나랑은 안 맞을 게 뻔했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이 남자가 술을 안 마신다는 거였다. 세상에 술을 안 마시는 남자도 있다고? 자타공인 애주가인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만있자... 술을 안 마시면 어디서 만나지?'
이제껏 남자 친구를 만나면 영화 보고 술 마시고, 차 마시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술 마시고, 데이트 마무리는 무조건 술이었는데 술을 안 마시는 남자랑은 뭘 하고 놀아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남편과 처음 만난 날, 1차로 스테이크를 먹고 2차로 커피를 마셨다. 말짱한 정신으로 집에 가려니 어색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목이 잔뜩 말랐던 사람처럼 술부터 꺼내 마셨다. 어으! 좀 살 것 같았다.
두 번째 만남부터는 밥을 먹다가 참지 못하고 술을 시켰다. 이제 좀 데이트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혼자 먹으려니 흥이 좀 떨어졌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다행히 남편은 내가 술 마시는 걸 크게 싫어하지 않았다. 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해버리는 건 싫어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취하지도 않을 거면 술을 뭐하러 마시냐?”며 큰소리를 쳤다. 술의 ㅅ자도 모르는 남편은 그 느낌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술에 잔뜩 취해버리면 다음 날 이불킥할 일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럴때 같이 있던 사람이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신 상태로 모든 걸 지켜봤다면 이불을 두세번은 더 차게 된다. 그 사람이 남자친구라면? 이불을 찢고 싶다. 이런 날은 술 안 마시는 남자친구가 원망스럽다.
몇 번 만나보니 술 안 마시는 남자는 장점이 더 많았다. 내가 술에 아무리 취해도 한 사람은 늘 멀쩡하니 휴대폰이나 지갑을 잃어버릴 걱정도, 길을 헤맬 걱정도 없었다. 대리운전을 기다리거나 택시를 잡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생각보다 괜찮았지만 그래도 결혼까지는 좀 힘들 것 같았다. 밤에 남편이랑 둘이 술 한잔하는 재미도 없는 신혼이라니. 상상만 해도 별로였다.
결혼하고 보니 술 안 마시는 남자는 연애할 때보다 결혼 후에 더 좋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남자들은 일주일에도 몇 번씩 퇴근 후에 친구들이랑 술 한 잔씩 하고 들어올 텐데 우리 남편은 곧장 집으로 온다. 남편이 술만 마시면 연락이 안 된다거나 “금방 갈게” 해놓고 2시, 3시에 들어올 걱정도 안 해도 된다. 물론 내가 염려했던 대로 남편과 술잔을 부딪칠 일이 없는 건 좀 아쉽다. 그래도 내가 술을 마시면 옆에 앉아 안주라도 거들어주니 ‘혼술’의 쓸쓸함은 느낄 수 없다. 어느 정도 마시고 나서 “나 취했나 봐. 너무 졸려.” 하고 눈 비비며 방으로 들어가면 뒷정리도 해준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결혼은 무조건 술 안 마시는 남자랑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제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아이가 어릴수록 남편이 술을 안 마시면 좋다. 부부 동반 모임, 가족 모임, 각종 행사, 어디서든 내가 술을 참지 않아도 된다. 부부가 둘 다 술을 좋아하면 누가 술을 마시고 누가 아이를 돌볼 것인지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이번 모임에는 남편이 마시고 다음 모임에는 아내가 마시는 식으로 규칙을 정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모임에서 누군가 술병을 꺼내면 나는 재빨리 남편을 바라보며 "우리 딸 잘 부탁해!"하고 윙크만 날려주면 끝이다. 그러니 술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술을 안 마시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나는 다음 생에도 이 남자와 아니, 술을 안 마시는 남자랑 결혼할 거다. 무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