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채원 Feb 20. 2024

혼자 있는 마음

거실 유리창에 햇빛이 닿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평온하면서도 어색해서 유튜브로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을 틀어놓는다. 어젯밤에 사다 놓은 샌드위치를 천천히 씹는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면서 오늘은 무얼 하면 좋을지 고민해 본다.


남편과 아이들은 아침 7시 수서행 SRT를 타고 서울에 갔다. 지난가을 롯데월드에 다녀온 뒤로 툭하면 롯데월드에 가고 싶다고 서럽게 우는 둘째를 위해 남편이 큰맘 먹고 계획한 일정이다. 나는 다리를 다쳐 아직 제대로 걷지 못하기 때문에 집에 있기로 했다. 혼자 고생할 남편 걱정, 당일치기 장거리 여행에 피곤할 아이들 걱정,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한 일기예보 때문에 또 걱정. 걱정에 걱정을 차곡차곡 쌓다 보니 정작 혼자 남아있을 내 하루는 아무 계획 없이 시작하고 말았다.


1월 중순부터 해빗트래커를 쓰기 시작했다. 해빗트래커(habit tracker)는 직역하면 '습관 추적자'라는 뜻으로 매일 실천하고 싶은 습관을 적고 얼마나 자주 실천하는지 기록하는 도구를 말한다. 특별한 계획이 없으니 일단 늘 하던 대로 해빗트래커에 적힌 할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갔다. 먼저 유튜브를 보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클래식 음악을 한 곡 틀어놓고 오늘의 헤드라인 기사를 몇 개 골라 읽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 둘 체크하다 보니 이제 책 읽고 필사하는 일만 남았다. 시간은 아직도 오전 10시. 평소에는 일상에 내 루틴을 욱여넣느라 하루가 촘촘하게 보람찼는데 혼자 있으니까 보람과 여유가 넘친다.


로봇청소기를 돌려놓고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책을 읽는다. 아니, 읽으려고 했다. 눈을 떠 보니 책은 펼친 채로 가슴에 올려져 있고 나는 반쯤 앉은 자세로 누워 잠을 자다 깼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책을 챙겨 커피숍에 간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 책을 읽는다.  아메리카노가 식을 때쯤 책도 끝났다. 별거 아니지만 이런 게 딱 들어맞으면 기분이 좋다. 책이나 조금 더 읽을 생각으로 도서관에 가기로 한다. 커피숍 문을 열고 나오는데 연한 하늘빛 하늘과 적당히 예쁜 구름이 시야에 확 들어온다.


혼자 외출하면 이런 게 좋다. 일행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일 때면 키 작은 아이들을 바라보느라 하늘을 쳐다볼 틈이 없다.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도서관에 간다. 시간은 이미 저녁때가 다가오지만 오늘은 혼자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는 이 사소한 자유가 감격스럽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여잔데 나보다 대여섯 살쯤 많은 것 같고 혼자 사는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그녀가 혼자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한 건 한 번도 그녀가 다른 사람과 있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산책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봤을 때도, 아메리카노가 맛있다는 동네 커피숍에서 봤을 때도, 그리고 지금 도서관에서도 그녀는 혼자다.


그녀는 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냉철하면서도 온화한, 원칙을 지키면서도 융통성이 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혼자 있는 하루에 잔뜩 심취한 상태로 마주쳤더니 그녀가 더 멋있어 보였다. 내 추리대로 그녀가 혼자 산다면 그녀는 매일을 이렇게 보낼게 아닌가. 자신의 마음을 깊게 살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우면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일을 하면서. 책에 집중한 그녀를 멀리서 보며 혼자 사는 사람은 저렇게 다부진 얼굴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부러워한다.


서가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책을 구경하다 보니 다친 발목이 묵직한 게 느껴진다. 아쉽지만 지금까지 고른 책만 대출해서 집에 가기로 한다.

 

집은 여전히 고요하다. 남편과 아이들은 자정이 넘어야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마디도 안 했다는 걸 깨닫는다. 커피숍에서도 사이렌오더로 주문을 했고 도서관에서도 무인대출기를 이용했으니 말을 할 일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던가. 괜히 입을 열고 "아아" 소리를 내어본다.


혼자 사는 사람들도 내가 모르는 고충이 많을 거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다. 문득문득 외롭고 쓸쓸한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고 무거운 짐을 같이 옮길 사람이 없어 서러울 수도 있고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난처할 수도 있을 거다. 국 세상엔 마냥 좋기만 한 일도 없고 마냥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또 한 번 깨닫는다.


혼자 보낸 시간 동안 나를 살뜰히 살폈다. 충분히 좋아진 기분 덕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더 충실히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일상으로 돌아가 잘 지내다가 다음에는 내가 아이들과 집을 떠나 줘야겠다. 남편도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늙어가는 연예인을 보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