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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고통과 환희라는 두 얼굴의 이름

by 긍정의 힘 Oct 04. 2022

영어는 내 인생에 완전히 다른 두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고통과 괴로움'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환희와 기쁨'이다.


'고통과 괴로움'의 얼굴은 고등학교 시절에 왔다. 보충수업을 포함해서 매일 두 시간씩 영어수업을 들었던 나는 영어가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다.


영어로 인해 내 삶은 힘들었고, 영어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적이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영어를 접한 나는 단어의 철자를 외워야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예를 들어 소년이라는 단어를 외우기 위해서 "b", "o", "y"라는 세 개의 영문 철자를 순서대로 '외워야'한다는 사실이 꽤 큰 충격이었다.


'철자 하나하나를 외워 단어를 조합하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일까?'

내 머릿속은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중학교 영어는 버틸만했다. 단어 수준이 높지 않았고, 시험문제도 대충 때려 맞추면 얼추 점수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부터는 달랐다. 단어가 어려워 도통 외울 수도 없었으며, 문법책의 첫 단원에 등장하는 '형식'도 헷갈렸다. 대략 1형식과 2형식은 알겠는데, 그다음부터는 그냥 감으로 찍었다.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다. 영어수업 시간에 최대한 집중해 수업을 들어본 적도 있으나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영어는 내게 중국어, 아랍어 등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개인 과외나 학원을 다닐 여건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영포자'가 되었다.
<영어는 내 인생 최대의 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Photo by Aarón Blanco Tejedor on Unsplash

'그렇다면 영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나는 만화책과 무협지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영어라는 고통으로부터 나를 탈출시켜 줄 최적의 파트너였다.


아마, 술 담배에 빠져 현실을 도피하는 어른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거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래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그 시간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내 손에 들린 것은 더 이상 만화책이나 무협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수학책'이었다.


그렇다. 난 영어 시간에 혼자 몰래 수학 공부를 한 것이다. 그나마 수학을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OO아, 넌 공부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수학 점수는 잘 나온다."라는 칭찬 아닌 칭찬의 말도 들었다.


사실, 공부를 안 한다는 이미지에 비해 나쁘지 않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영어 점수는 어땠을까? 고등학교 3년 내내, 나의 영어 점수는 '양'이었다. 당시 '수우미양가'의 점수 체계에서 '양'은 60점대의 점수였다.


'가'를 받는 학생이 거의 전무했기에 낙제인 셈이었다. 덕분에 내 고등학교 내신은 10등급 중 9등급이었다. 물론 아래쪽이다. 영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영어는 내 인생에 저주를 내렸고, 나는 공대에 진학했다. 잠시 행복했다. 더 이상 영어를 쳐다보지 않아도 될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영어'가 선택필수라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았고, 일부 전공책이 영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영어는 나를 고통의 굴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의 얼굴을 한 영어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대학 2년을 마치고, 나는 25개월 군 복무 후 1997년 4월에 전역했다. 여성으로 따지자면, 막 대학교를 졸업한 셈이었다.


복학이 이듬해 3월이기에, 난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대학생활 2년간 한라산, 지리산 등반은 물론 '자전거 하이킹'이라는 개념도 모른 채, 10여 일을 노숙하며 충청도에서 강원도까지 자전거 여행을 할 정도로 여행, 아니 모험을 좋아했던 나는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모험이 가득한 여행.


때마침 나보다 일찍 전역한 친구가, 휴학 기간에 '방콕'에 다녀왔다는 말에,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해외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딱 내가 원했던 그림이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방콕'이 사실 그 방콕이 아니었다. '방에서 콕' 즉, 어디도 안 가고 집에만 있었다는 말이었다.


해외여행이 드문 당시로서는 매우 센스 넘치는 농담이었고, 이를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덕분에 용기백배한 나는 결국, 그 해 여름 유럽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유럽에서의 여행은 순탄치 않았다. 매 순간이 모험과 도전이었다.


매표소에서 기차 시간을 잘못 알아들어 기차역에서 노숙하기도 했고, 주문이 익숙지 않아 거의 맥도널드에서만 식사를 해결했다. 사실, 고백컨데 맥도널드는 당시 내게 고급 음식이었기에 전혀 불만은 없었다.


의사소통 수단은 입이 아닌 손과 발이 대신했다. 빨랫비누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 점원에게 입고 있는 티셔츠를 빠는 흉내를 냈고, 길을 물을 때 온갖 몸짓을 총동원해야 했다.


스마트폰이 여행가이드가 되어주는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그럼에도 유럽여행은 한없이 즐거웠다. 좌충우돌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꽤나 재미있었다.


현지에서 보는 건축물과 예술작품에 경탄하였으며,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았다. 소중하지 않은 기억이 없었다. 모든 것이 큰 선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은 따로 있었다.


영어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하겠지만 80년대 지방 중소도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내겐 그렇지 않았다.


외국인을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외국인을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 잽싸게 멀리 도망갔다. 호기심보다는 낯섦과 무서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주변에 영어 '회화'를 공부하는 사람도 전무했기에, 영어를 실생활에서 접할 기회가 아예 없었다.


자연스럽게 영어는 내게, 사회나 과학과 같은 암기과목이 되었다. 철자 하나하나의 순서를 외워 단어를 조합하는 암기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그랬던 내가 유럽 배낭여행을 통해 영어가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몸소 체득한 것이었다.


영어 회화가 가능한 한국 관광객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며, 힘들게 몸짓과 손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여행 후 나는 그 길로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첫 시간부터 의사소통을 몸이 아닌 '입'으로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더군다나 평생 남자만 가득한 수업 시간에 '여자'가 있다는 점도 동기부여가 되었다.


만화책과 무협지에 빠졌던 것처럼 나는 영어에 푹 빠졌다. 내 인생 가장 강한 중독이었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영어를 공부, 아니 익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EBS 영어채널을 켜고 녹음했다. 녹음한 테이프를 하루 종일 이어폰으로 들었다. 친구와 대화할 때도, 당구를 칠 때도 내 귀에는 항상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날 익힌 표현은 학원에서 테스트하며 체득했다. 잠자리에 들 때도 이어폰을 꽂고 잤다. 영어로 꿈꾸는 경험은 비일비재했으며 깨어있을 때도 '이 상황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까?'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다.


하루하루 발전하는 영어 실력에 기뻤으며, 외국에 살다 왔냐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으며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어는 내게 '환희와 기쁨'의 얼굴이 되었다.  

<영어의 대반전. 이제 영어는 내게 기쁨이자 환희의 얼굴이 되었다.> 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

이후 나는 전공을 떠나, 졸업하자마자 수도권의 유명학원에서 영어 회화강사가 되었다. 공기업 입사도 높은 영어점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40이 넘은 나이에 미국에서 석사를 받았으며, 석사 받은 학교의 미국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3학기 동안 각 3시간씩 수업도 진행했다. 물론 영어로.


지금 회사에서는 영어 번역 검수는 물론, CEO 통역을 하고 있으며, 내외부 요청으로 외국인 방문단에게 관련 업무를 강의하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영어가 내 인생을 바꾼 것이다.


예전과 같은 열정은 아니지만, 영어 회화 익히기를 시작한 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생활 속에서 꾸준히 영어를 접하고 있다.


스마트 폰이 나온 이후로는 좀 더 수월해졌다. 테드, 아리랑TV, CNBC를 들으며 관심분야 및 시사의 영어 표현에 익숙해진다.  


국뽕이 차오를 때면 BTS나 블랙핑크 영어 리액션을 본다. 재미와 비속어를 포함한 실생활 영어 표현을 익히기에 딱이다.


영어를 접할 때 준비작업이 필요 없다. 앱을 그냥 듣는다. 굳이 정자세로 집중해서 듣지도 않는다.


산책할 때나 운동할 때, 그리고 설거지나 청소할 때 음악처럼 흘려듣는다.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스마트 폰, 자동차, 그리고 컴퓨터의 언어를 영어로 설정했다.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도 영어로 하면 효율은 더 높아진다.    


한국에 살면서도 영어를 습관처럼 익힐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어요?" 이런 질문을 수시로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답한다.


"영어는 습관"이라


p.s.) 영어를 혐오하던 제가 영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대문 이미지: Photo by Ryan Wallac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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