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배송 덕에 내 어깨충돌증후군은 크게 더 악화되지 않고 그럭저럭 다독이며 지내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진 어제 아침, 큰 아이 학교를 보내고 쿠팡과 오아시스 박스를 들고 오려는데 쿠팡은 있는데 오아시스 박스는 없다. 근데 오아시스 박스는 없지만 낯설고 큰 박스가 있어서 오아시스가 박스를 재활용했나 싶었는데 겨우 오리고기 한팩에 깻잎과 당근, 파프리카 두 알, 김밥김 하나를 이리 큰 박스에?
박스를 열어보니 여행 가며 강아지를 맡긴 친구가 과일로 우리 집을 폭격했다. 각종 과일이 한알 두 알 혹은 서너 알씩 정성스레 포장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예정에 없던 냉장고 정리가 시작되었다. 과일킬러들을 키우고 있지만 냉파(냉장고 파먹기)를 과일로 하다니 호사스러운 냉파가 될 듯하다.
사실, 선물은 내가 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 친구의 강아지는 정말 순하고 똑똑하고 낯도 전혀 안 가려서 어느 집에서든 환영받을 녀석인데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는 우리 강이 별이를 위해 친구가 우리 집에 맡겨주는 것이라서 내가 고마워하는 중인데 한아름 과일 꾸러미를 기분 좋게 받으니 좋으면서도 또 민망하다. 냉장고와 입체 테트리스를 한판 겨루고 출근을 하며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호텔에 우아하게 묶고 있을 예쁜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대신 미치겠다와 환장한단 말로 고마움을 전해본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카톡이 울린다.
소형차 퀵 배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출발지: ***플라워님 도착지: ㅇㅇㅇ님, 서울 ㅇㅇ구 ㅇㅇ로 88 배송완료 시간 : 08월 21일 12시 35분
잉? 소형차 퀵? 기억을 더듬어 본다.
월요일에 주문한 애들 샴푸인가? 그럴 리가 만무하다. 겨우 만삼천 원짜리 샴푸를 퀵으로 배송해줄리 없다.
현재의 나와 다른 과거의 내가 주문해 놓고 까맣게 잊고 있던 무언가가 있나?
나만 그런 거라면 심히 부끄럽지만 가끔 택배박스가 오고 나서 내가 이걸 주문했구나 하기도 하고, 택배를 기다리는데 안 오기도 한다. 주로 집안에서 쓰는 잡다한 생필품이나 아이들 간식등을 주문할까 말까 망설이다 특가란 말에 주문해놓고 까먹기도 하고, 주문을 미처 끝내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문하기 버튼만 서너 번을 누르고 쿠폰, 포인트 쓸지 말지 누르고 결제하기도 몇 번 눌러야 하는 사이트들 주문은 특히나 그렇다. 오늘 아침 기다렸던 오아시스도 결제하러 네이버페이로 넘어간 후 내 정신을 어딘가에 빼앗겼던 게 분명하다. 폭우로 못 온 줄 알고 조용히 기다리다 출근했는데도 배송문자가 없어 확인하니 주문내역이 없다.
머릿속을 다 헤집어 봐도 내가 주문한 무언가는 생각나지 않는다. 게다가 보낸 사람이 ***플라워 아닌가? 꽃집이 틀림없다. ***플라워? 검색에 들어간다. 꽃집 간판을 보니 익숙한 느낌이 스친다. 집 근처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던 꽃집이 장소를 옮겼나 보다.
누가 꽃을 보냈지?
남편이?
그럴 리가!
내 생일에 꽃을 사 오는 것도 10년 가까이 파블로프의 강아지에게 종소리와 밥을 매칭해 주듯 특훈을 거듭해 엎드려 절 받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무 날도 아니지만 "지나가다가 너 생각나서 샀어." 하는 서프라이즈는 그에게 기대하기 힘들뿐더러 어울리지도 않는다.
뭐지? 하고 궁금해하는 나에게 회사 동료들은 남편분이 틀림없다고 물어보란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만약 남편이 보낸 거면 그 자리 있던 세명을 호텔뷔페를 데리고 가겠노라 약속을 하고 검색했던 꽃집에 전화를 걸어본다. 호텔뷔페는 날아가고, 이쁜 짓의 주인공은 이웃에 사는 동생이었다. 내가 너무나 이뻐라 하는 동생. 이런 짓 안 해도 이쁨이 넘쳐흐르는그녀가 이쁜 짓만 골라한다.
꽃을 받았다는 사실에 설레고, 퇴근해서 꽃을 보고 한 번 더 기쁘고, 저녁을 먹고 꽃병에 담으며 한 번 더 행복했다. 예쁜 보라색들의 톤온톤 꽃다발을 보고 스무 살에 입었던 자주와 보라 중간쯤의 블라우스도 떠오르고, 서른 즘 바쁘게 일할 때 입었던 보라색 스커트도 떠오른다.
알록달록한 과일로 입과 몸을 채우고, 어여쁜 꽃으로 눈과 마음을 채우니 하루가 행복으로 가득 차오른다. 사실 예전엔 이런 비싼 선물들을 마냥 기뻐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외양보다는 실속이 좋아서 고급 과일 세트나 비싼 꽃을 받으면 내가 아끼는 그들이 그런 돈을 많이 썼다는 것이 아까웠던 것이다. 누군가 5만 원짜리인데 3만 원에 세일해서 샀다고 하면 8만 원짜리를 받은 듯 기쁘다가, 5만 원짜리인데 백화점에서 사서 7만 원에 샀다고 하면 그 2만 원이 너무 아까운 그 기분. (아... 글로 쓰고 나니 상당히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제 받은 선물들을 보며 그녀들 덕에 누리는 호사를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되짚어 보니 선물의 의미라는 것이 주는 사람의 마음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그 의미의 마무리는 받은 사람의 마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선물을 건네준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마음껏 행복해하는 것이 최고의 보답인지도 모른다. 조금 더 좋은 것에 더 많은 마음을 담아 보내주었다면 그 마음을 온전히 느끼며 감사해야겠다. 과일과 꽃으로 습격당한 알록달록한 설렘에 나도 반격을 궁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