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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희 Nov 01. 2019

아빠가 들려주는 삶의 맛



 나의 평일 아침은, 정확히는 아가들이 눈을 떠 어린이집 등원할 때까지의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흘러간다. 두 아이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머리 만져주고. 양말과 신발을 신겨 겨우 유모차에 앉히려는 순간 한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몸에 잔뜩 힘을 준다. 그렇다. 바로 그 신호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동작을 리버스 하여 다시 진행한다. 휴우....

 엊그제도 이런 과정을 반복해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에 어렵사리 도착했다. 아가들을 각자의 반에 들여보내고 밖으로 나오니 '하아'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쌍둥이 유모차를 유모차 전용 주차공간에 대고 건물 바깥으로 막 나가려던 때였다.


 "쌍둥이 어머님이신가 봐요? 안녕하세요."


 수수한 감색 양복에 옅은 하늘색 넥타이를 한 남자가 반색을 하며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삼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남자는 키가 작고 몸이 왜소했다. 3대 7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넘겼으나 숱이 많지 않았다. 나는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어머님, 이것 좀 봐주실래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해 드리려 해요."


 남자는 금방이라도 내가 자리를 뜰 것처럼 보였는지 소책자를 부리나케 내게 안겼다. G학습지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님, 아이들 월령이 어떻게 되나요? 요즘은 어머님들이 아이들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셔서 돌만 지나도 바로 프로그램을 진행하세요. 저희 학습지는 국내 종합 학습지 중에선 유일하게 유아에서 고교까지 전 교육과정을 맞춤식으로 다룬답니다. 월령에 맞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으니 한번 봐주세요."


 남자는 막힘없이 한 번에 문장들을 토해내더니 그제야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아빠, 엄마를 소리로 옮기는 아가들에게 교육이라니! 조금 민망하기도, 우습기도 했다. 피식 떠오르는 웃음을 삼키고 소책자에서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혹시 모를 성사를 기대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데 누렇게 변색된 와이셔츠 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와이셔츠를 바라보면서 나는 딴생각을 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 아저씨에게도 가족이 있겠지? 몇 시부터 나와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식사는 하셨으려나...'


 예전의 나라면 냉소적으로 얼굴을 돌렸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아직 많이 어리긴 한데 제가 살펴보고 추후에라도 필요하면 이 번호로 연락드릴게요. 수고하세요."


 "어머님 잘 검토하시고 꼭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남자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곱게 물든 아파트 정원의 은행나무가 표표히 잎을 떨구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날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 아가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왔더니 남편이 축 처진 모습으로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남편의 손에는 맥주가 들려있었다.


 "치킨 괜찮지? 퇴근하며 배달앱으로 시켰어. 20분 내로 도착할 거야. 맥주랑 같이 먹자.”


 "저녁 안 먹은 거 아냐? 밥이랑 김치도 좀 꺼낼까?"


 "아냐, 괜찮아. 치킨이면 돼."


 남편이 거실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동안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려니 인터폰이 울렸다. 동시에 "아!" 하는 남편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수도꼭지를 잠그고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며 남편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절을 하고 있어.....”


 “절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이것 좀 봐..."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후다닥 거실로 나왔다. 곧바로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아..."


 화면 속의 남자가 보이지도 않는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1층 현관문이 열렸는데도 남자는 허리를 굽힌 채 한참을 서있었다.


 문을 여니 3층까지 한달음에 올라오셨는지 사장님이 헉헉 대며 땀을 흘리고 계셨다. 얼굴에 잔주름이 무성하고 백발이 성성한 사장님이 치킨이 든 상자를 남편에게 건네며 또다시 감사하다며 허리를 굽히셨다. 그 모습을 보는데 돌연 가슴이 울렁대고 눈물이 그렁해지고 말았다.


 "사장님 늦은 시각인데 배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시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개를 숙이는 사장님을 향해 우리 부부도 깊게 허리를 숙였다.


 어린이집 앞에서 아이를 등원시키는 엄마들에게 학습지 홍보 책자를 건네며 이른 아침부터 열심히 영업하던 30대의 영업맨. 밤 11시가 다 된 시각 치킨을 배달하며 초인종에 대고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던 초로의 사장님.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을 것이다. 강해 보이지만 가끔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어깨. 그 어깨에는 ‘가장’이란 두 글자가 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가장의 무게에 대하여.


 상자를 여니 갓 튀겨진 치킨의 구수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닭다리를 집어 남편에게 넌지시 건넸다.


 "부쩍 퇴근도 늦어지고 회사일이 많아졌나 봐. 힘들지 않아? 기운 없어 보여."


 “기운 없어 보이나? 글쎄, 일이야 늘 많은 거고 그렇게 힘들진 않은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괜찮아. 그리고 우리 쌍둥이 먹는 양이 장난 아닌데 딴생각 말고 열심히 다녀야지, 안 그래?


 남편은 맥주를 들이켜며 호탕하게 웃었다. 호쾌한 웃음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학습지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우리 남편도 가족을 위해 힘들어도 밥벌이를 하는 거다. 지겹고 지루해도 가족을 위해 묵묵히, 새벽같이 집을 나가 별을 헤며 들어오는 그런 전쟁 같은 삶을 이어가는 거다. 그래도 남편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아내와 무럭무럭 자라나는 자식들이 있다면 조금은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물우물 치킨을 씹는 남편 입에 치킨무를 하나 집어넣어 주었다.


 “오늘 유난히 서비스가 좋네?”


 “그래서 왜, 싫어?”


 “싫기는, 갑자기 이러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그렇지.”


 그러면서 남편은 웃고 있다. 나도 빙긋이 따라 웃는다. 길었던 하루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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