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가 지날 무렵 하늘에서는 뭉글뭉글 검은 비구름이 퍼졌다. 남편이 온라인으로 뭇남성과 중고 텔레비전을 거래하는 동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혼수로 마련해온 텔레비전에 만족하며 살던 우리는 작년 초 안방에 텔레비전을 한대 더 마련했다.그런데 쌍둥이가 태어나고 안방을 아기용 침실로 꾸미면서 새 텔레비전의 자리가 애매해졌다.이번 연휴에 그 텔레비전을 처분하기로 했다.
남편은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릴 텔레비전의 사진을 찍으며 감탄과 탄식을 반복했다. "이건 정말 새거나 다름없어. 이거 사가는 사람은 땡잡은 거라니깐!" 하더니 "명절이니까 시세보다 만원 저렴하게 올려야지." 하면서 멋쩍은 듯 웃었다.
남편 말대로 '땡'잡은 텔레비전이 맞긴 한 건지 올린 지 10분도 안돼 구매 희망자에게서 연락이 왔다.1시간 내 텔레비전을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 "빗물이 들어가면 안 되니깐." 하며 남편이 큰 비닐로 텔레비전을 꼼꼼히 감쌌다. "리모컨도 잘 챙겼지?" 세심한 아내가 되어 한마디 거드니 "그건 아까부터 챙겨뒀지."라며 남편은 호언했다.
창에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부딪히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거세졌다.얼굴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텐데 남편은 개의치 않고 텔레비전을 번쩍 들더니 집 앞 약속 장소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돌아왔다. 좀 전까지 한 공간에 있던 '우리의 물건'을 가져가신 분이 괜스레 궁금해졌다.
"빨리 다녀왔네? 어떤 분이셨어?"
"40대 후반쯤? 서글서글한 분이셨어. 무슨 일을 하시는지 큰 용달차를 몰고 오셨더라고."
남편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싱글거렸다.
"내일 몇 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신대. 어머니 방에 텔레비전을 바꿔드리려고 했는데 좋은게 올라와서 너무 좋으셨대."
"어머...정말? 그런 줄 알았으면 더 예쁘게 포장해드릴걸 그랬다!"
몇 년 만에 고향에 가는 아들이 노모에게 텔레비전을 사 드리려고 빗길을 뚫고 와 중고(지만 새거나 다름없는) 텔레비전을 사 가셨다니...왠지 뭉클해졌다.
그러다, 거실에서 남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
"왜?"
남편의 손에 검정 리모컨이들려있었다.
"아까 텔레비전 비닐로 싸다가 정작 이걸 빠뜨렸네..."
"내가 그만큼 잘 챙기랬는데..! 빨리 아저씨께 전화드려!"
통화는 금세 끝났다.
"아저씨 오실 수 있대?"
"응 10분이면 도착하실 거 같대. 금남시장 막 지나고 계셨대."
"다행이다. 뭐라고 안 하셔?"
"흔쾌히 금방 오시겠다고 하네?"
"너무 좋은 분이시다."
불현듯 청귤청 생각이 났다. 임신 중이던 작년 한 해 건너뛰고, 지난 여름 얇게 썬 청귤을설탕과 꿀에 버무려 꾹꾹 눌러둔 청귤청. 냉장고에서 얼른 꺼내 유리병에 청귤청을 포장했다.
"아저씨한테 '아내가 만든 유기농 청귤청인데 고향 어머님께 드리세요'하고 전해드려."
남편이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저씨께 잘 전해드렸어?"
"응 정말 고맙다면서 큰소리로 "잘 먹겠습니다!" 하시더라. 하하"
판매자의 실수로 비 오는 날 두 번 걸음 하게 되었는데도 볼멘소리 하나 없으셨던 아저씨.그런 아저씨가 고마워 소소한 선물을 건넨 우리 부부. 너그러움이란 상호 작용이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은 연휴의 시작이었다.
*청귤은 덜 익은 초록색 껍질의 풋귤을 말하는 것으로 제주에서 매년 7~8월경 구매할 수 있어요. 청귤은 채칼을 이용해 슬라이스 하면 일정한 두께로 편히 썰 수 있으나 손이 베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완성된 청귤청은 뜨거운 물을 부어 차로 마실 수도 있고, 탄산수를 넣어 에이드로도 즐길 수 있어요. 청귤청에 토닉워터, 프리미엄 소주(ex. 일품진로)를 섞고 얼음을 더하면 근사한 청귤 칵테일로 변신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