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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희 Nov 03. 2019

냉면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빨래를 개고 있으려니 남편이 슬쩍 다가왔다.


 "날이 더워지니 물냉면이 생각나네. 애들이랑 냉면집 가긴 무리겠지?"


 "저 꼬맹이들 데리고? 도착과 동시에 후회하게 될 거야. 노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 역시 여운이 남았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냉면 국물과 부드럽게 입에 감기는 메밀면만큼 더위와 잘 어울리는 메뉴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도 물컵에 손가락을 넣고 입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헤헤거리는 철부지들을 보자니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올해 첫 냉면인데 아무거나 먹긴 그렇잖아? 중구에 있는 P에 가야 할 텐데 애들 때문에 민폐가 될 거 같아."


 남편도 이해한다는 듯 더 이상은 말을 보태지 않았다.


 사실 올여름 처음으로 꼬맹이들과 냉면을 개시하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남편도 그랬나 보다. 하지만 북적거리는 냉면집에 데려가기에 꼬맹이들은 아직 어리다. 유명한 집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 이 더위에 꼬맹이들을 데리고 줄 섰다가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탈진하고 말 것이다. 설사 쉽게 자리를 잡는다 해도 아이들의 부산스러움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은 냉면집 분위기에 폐가 될게 뻔하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다. 꼬맹이들과 냉면을 함께 먹어보고 싶은 미련.


 냉면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까짓것, 내 방식대로 만들어 즐기면 그만인 거 아닌가. 냉면 육수는 기본적으로 동치미 국물에 쇠고기 육수를 섞어 만든다. 우리 집에는 동치미 국물이 없다. 하지만 꼬맹이들이 잘 먹어서 늘 만들어두는 '무초절임 김치'는 있다.


 무초절임의 국물이 새콤해서 동치미 국물과 얼추 맛이 비슷하다. 양지로 육수를 뽑고 거기에 김칫국물을 섞으면 '냉면의 아류(流)' 정도로 구색은 맞출 수 있지 않을까. 다음날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앞치마의 끈을 꽉 묶고, 비누로 뽀드득뽀드득 손을 씻었다. 잘 닦인 도마 위에선 선홍색의 한우 양지와 대파, 생강, 마늘 등의 향신채가 이제나저제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으로 준비한 양지는 반으로 가르고, 파뿌리와 양파껍질, 검은색 통후추도 꺼내왔다. 곧 한우 양지가 냄비에 점잖게 들어앉았고, 천천히 끓여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전체엔 소고기가 삶아지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져나갔다. 다 끓여진 고깃국물은 냉장고에서 서너 시간 뒀다.


 차갑게 식은 육수 위에 뜬 허연 쇠기름을 걷어내고 면포로 육수를 한번 더 걸렀다. 삶아진 고기는 젖은 행주에 싸고 눌러 편육으로 만들었다. 편육은 고명으로 냉면에 곁들여질 것이다.


 냉장고에 있던 무초절임 국물과 차가운 쇠고기 육수를 적당히 합했다. 2배 식초, 설탕과 소금을 조금씩 조금씩 더 넣으며 간을 보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최종 국물 맛을 보았다.


 '정말 냉면육수 맛이 나네....'


 발효된 무초절임 김치에서 우러난 시큼한 단맛에, 쇠고기 육수의 구수하고 담백한 감칠맛이 더해져 냉면 육수 같은 맛이 났다. 그렇게 완성된 '엄마표 물냉면 육수'는 냉동실로 옮겨 잠시 시간을 가졌다.


 유기에 1인분씩 냉면 사리를 담고 무초절임과 쇠고기 편육을 꾸미로 듬뿍 얹었다. 살짝 얼려 살얼음이 끼게 준비한 홈메이드 냉면육수를 자작하게 부었다. 매콤하게 먹는 걸 좋아하는 남편의 식성을 고려해 묽은 겨자장도 곁들였다.


 꼬맹이들이 호기롭게 쳐다보더니 냉면을 길게 집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국물도 곧 먹기 시작했다. 남편은 행동으로 반응했다. 쉴 새 없이 면치기를 하며 냉면 국물을 들이켰다.


 "아 시원하다. 육수 어떻게 만들었어? 완전 냉면집 맛인걸?"


 "그럴듯하지? 육수 맛의 비밀은, 꾸미로 올린 무초절임과 쇠고기 편육이 힌트야!"


 "알려줘도 만들 순 없을 거야. 더 있어?


 냉면을 더 가져다주며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은 육수는 얼려뒀어.  몇 번 더 먹을 수 있을 거야. 설거지는 당신이 해!"


 "물론이지! 설거지쯤이야~"


 남편이 빙긋이 웃으며 포크질을 멈추지 않는 꼬맹이들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좇아 나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사실 이 냉면육수는 정석에서 한참 벗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리에 '정석'이 어디 있으며 '정답'이 어디 있으랴. 자신의 생각을 담아 비슷하게 맛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무초절임은 무를 식초로 절여 만드는 간단한 요리인데 무는 아삭하고, 국물은 쨍해서 특히 더운 여름에 제격이다. 새콤한 국물은 쇠고기 육수와 섞으니 그럴듯한 냉면육수로 변신해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요리교실에서도 언젠가 소개해야겠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은 널리 전파할수록 좋은 거니까.




recipe


                               

                             무초절임 김치


재료

무 1.2kg, 태양초 고춧가루 1T, 멸치액젓 2T, 간수 뺀 천일염 1t, 자일로스 설탕 2T, 다진 마늘 3T, 생강청 1t, 2배 식초 4T


만드는 

1. 무를 일정한 두께로 얇게 채 썬다.

2. 큰 볼에 무채를 넣고 고춧가루를 조금씩 추가해가며 고춧물을 들인다.

3. 멸치액젓→천일염→설탕 순으로 무채에 넣고 고루 버무린 후 다진 마늘, 생강청, 2배 식초를 더한다.

4. 밀폐용기에 절여진 무채를 넣은 후 손으로 꾹꾹 눌러 마무리해 냉장고에 둔다.

5. 숙성을 거쳐 3일 후부터 먹을 수 있다.


*무채는 채칼을 이용해 썰면 간격과 두께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 좋지만 자칫 손을 다칠 수 있으니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주세요. 멸치액젓은 취향에 따라 참치액젓으로도 대체 가능해요. 멸치액젓과 참치액젓을 반반 섞어 사용해도 좋고요. 무채에 양념을 넣어 버무릴 땐 가급적 도구가 아닌 손으로 해주세요. 손의 체온이 천일염과 설탕이 잘 녹도록 도와주거든요. 간이 세지 않기 때문에 아이용 무김치로도 먹이기 좋아요. 저희 둥이는 이 '무김치'를 생후 17개월부터 먹기 시작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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