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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Oct 10. 2020

꽃도 피어날 때는 시간이 필요해

봄날 할머니가 준 씨앗을 심으며.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만큼 성미가 급하다. 어렸을 때부터 안 가본 학원이 없을 정도로 궁금하면 뭐든 도전해서 해봐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하지만 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재밌었던 건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주말농장처럼 할머니가 일궈놓은 드넓은 밭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가곤 했다. 두세 시간 걸리는 다른 친척집에 갈 때는 가기도 전에 언제 오냐며 떼를 썼는데 ……. 할머니의 밭까지 가는 거리는 가까웠다. 또 무엇보다 열린 과실을 수확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나도 집에 작은 화분 하나를 만들었다. 초등학교 실과시간이나 학기초면 학교에서는 모종을 사오라 했다. 이미 어느 정도 자란 모종을 키우게 하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 처음부터 내 손으로 내가 무언가를 키워보고 싶었었다.

  배양토를 살짝 파서 할머니가 준 토마토 씨앗을 넣고 흙을 다시 덮었다. 내 머릿속은 이미 잭과 콩나무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하늘 위로 넝쿨들이 가득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싹은 올라오지 않았다. 고작 이틀이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내게 '진득하게 기다리는 맛이 있어야지 넌 너무 성격이 급해'라며 조급해하는 나를 가라앉히곤 했다.


내가 하는 건 장거리 달리기야

  노력하려고 해도 성향, 성격은 잘 변하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탓에 뭐든 빨리 하려고 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빠릿빠릿하지만 허당끼가 있다고 했다. 고객사에게 이메일을 즉각 답장했던 것은 좋지만 메일 내용에 오타가 있었던 적도 있었다. 또 파일을 첨부하지 않은 채 보낼 때도 종종 있었다. 또 기간이 오래 남았는데도 빨리 해치워 버리려고 하는 성격은 실수를 부르기도 했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게 많은 백수 시절에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계획만 무성하게 잡아놓고선 이거 찔끔 저것 찔끔하기 일수였다.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게 무엇인지 난 알지 못했다. 빨리 마무리 짓고 다음일을 진행시켜야 했으니.




"꽃도 피어날 때 시간이 필요하듯"

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꽃이 피어날 때 시간이 필요해. 열매가 날 때도 마찬가지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 며칠이나 됐다고 싹이 안 난다며 뾰로통해진 내게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엄마는 널 낳으려고 열 달을 배에서 품었어. 네가 그냥 나온 게 아니야." 

기다림에 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나를 낳은 얘기를 하는 할머니의 사뭇 진지한 말씀에 피식 웃음이 났다. 기다리는 것도 미덕인 세상에 난 왜 이렇게 급할까. 할머니에게 한 달 안에는 싹이 돋을 거란 약속을 받고도 '아 한 달 어떻게 기다려'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의 화분 심기는 잊혀 가고 있었다.

  기억에서 멀어질 때쯤 화분에서 싹이 돋았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볕 좋은 곳에 놔두고 물을 주고 반복에 반복을 해서였을까. 매일 들여다보며 기대하지 않아도 시간은 갔고, 화분 속에서 싹도 피어났다. 

"매일 들여다보지 않아도 시간은 가니까"

매일 신경을 오래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다. 기다리지 않고 물 흐르듯 계속하다 보면 되는 것들도 있고 굳이 그 속을 매일 꺼내보고 만져 보면 내 예민한 신경을 내가 덧내기도 한다. 어느 봄날이었다.


  방울토마토가 달렸다. 할머니가 준 씨앗이 모종처럼 커지고 몇 달이 지나니 토마토 하나가 초록색으로 영글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힘을 빼면 이루어지는 것들"


  잠시 힘을 빼기로 한다. 찬찬히 내가 쓴 업무 내용들을 들여다봤다. 완벽하다고 느꼈는데 오탈자가 많았다. 수정을 하고 또 들여다봤다. 아닌 것들이 눈에 보이자 시간을 느긋하게 가지고 하나하나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하나하나가 다시 보였다. 힘을 잠시 빼고 기다려도 된다. 빨리 결과를 얻으려 전전긍긍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매일매일 마음을 스트레칭해보기로 한다. 굳은 근육을 푸는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지만 해보자. 시간을 다스릴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음 상태를 만들자.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지만 같이 걸어갈 수도 저만치 앞서 갈 수도 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2018년 봄, 집에 가는 길에 바질 모종 하나를 사서 키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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