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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Oct 14. 2020

엄마로 말할 거 같으면

엄마는 7월에 태어난 예쁜 풍경이다.

  아름다울 미, 경치 경 우리 엄마의 이름이다. 7월은 엄마의 생일이기도 한국의 전통적인 단어로 환갑이라고도 불린다. 2020년 엄마의 생일 그리고 환갑 남들은 환갑잔치다 뭐다 번쩍번쩍하게 해 주던데 이번 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특별한 뭔가가 없을까. 엄마에게 금전적으로 시원하게 뭔가를 해줄 수 없어 걱정이 앞섰다. 서른이 넘으면 번듯한 직장에 다니면서 가족 식구 전부 다는 아니어도 외가 쪽 식구들을 불러 뷔페나 호텔 같은 데서 근사 하게 꾸며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몇몇 친한 지인들에게 물어봤다. 엄마 60 생신 어떻게 해 드려? 돌아오는 답은 다 비슷비슷했다. '여행, 현금이 최고지, 명품 목걸이 하나 해 드리는 건 어때?' 그렇게 당장 할 수 있으면 지금 이 시간 예약을 하고도 남았겠지. 나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엄마에게 뭔가 특별한 걸 해줄 수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릴 적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시켜줬다.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해서 피아노 학원을 보내줬는데 나중에는 바이올린을 하고 싶다 했다. 그래서 바이올린도 가르쳐줬었다. 몸이 커지면서 몸집에 맞는 바이올린으로 계속 교체를 해야 했다. 엄마는 당시 가격으로 600만 원 정도 되는 악기를 바꿔줬다. 돈 없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말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부자인 줄 착각했다. 당시 바이올린을 다니면서 웅변학원, 국영수에 논리속독 학원까지 다녔으니…….  엄마는 내가 관심이 있다고 한 것은 다 가르치려고 했으니까. 나는 당시 새로운 학원을 다닐 때면 신이 나서 나중에 크면 돈을 벌어 엄마에게 큰 집을 사줄 거라고 호언장담하듯 말하곤 했다. 어린 초등학생이 요즘 집값이 얼마나 비싼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아이에게 처음 만나는 세상은 엄마다. 그 당시 엄마는 내 전부였고, 뭐든 해주는 척척박사님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건 성인이 되고서 알았다. 그 돈 들은 안 입고 안 먹고 모은 돈들이었다. 화장을 하다가 우연히 엄마의 월급통장을 본 적이 있었다. 통장에는 일정 금액의 숫자가 찍혀 있었다. 또 다른 통장에는 받은 급여를 일정 금액씩 저축한 것들이 보였다. 엄마는 항상 본인보다 우리 가족을 챙겼다. 십육 년 동안 직장에 몸을 담으며 엄마는 제 옷보다는 할머니, 아빠, 나의 옷을 사 왔다. 

"아웃렛에서 샀는데 이거 원가가 얼만 줄 알아?" 엄마는 원래 가격표를 보여주며 이렇게나 비싼데 싸게 산거라며 좋아했다. 그럴 때면 나와 아빠는 촌스럽다고 하거나 '세일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결국 입을 거면서도 투덜대는 말투로 대답했다. 

  엄마가 소녀처럼 서운함을 표출한 건 이번 연도부터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는데 내가 몰라 줬을 수도 있다. 어버이날 내가 일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챙기지 못한 적이 있는데 그때 엄청 삐져있었다. 정확히는 섭섭했다는 표현이 맞을게다. 보통 누군가를 사귈 때도 기념일을 잘 안 챙기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무것도 안 해줬으니 서운한 게 당연하다. 


당시 엄마를 위해 주문제작한 비누꽃과 현금이다.






  엄마의 예순 살 생일은 내 선에서 최선이고 싶었다.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특별하게 해주고 싶었다. 먼저 팬시점에서 해피벌스데이라고 쓰여 있는 파티용 헬륨 풍선을 샀다. 근사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복식호흡을 배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단전에서부터 크게 숨을 내뱉었다. 꽤 많은 숨이 풍선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은 미역국을 끓였다. 손재주가 없지만 최선을 다해 그날은 일일 요리사를 자청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내 생일 때면 매년 미역국을 끓여놓고 갔었다. 요리하는 내 몸짓이 영 어색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뭘로 가든 평양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요리하는 폼은 어색했지만 레시피대로 해서 간이 얼추 맞았다. 다음으로 세팅된 것은 며칠 전 준비해 둔 감사장 케이크였다. 나는 주변 사람들은 살뜰히 챙겨도 정작 가족한테는 못하는 무뚝뚝한 딸이었다. 어느날부터 엄마와 내 간격이 벌어진 것도 그때부터였을까. 문자다 톡도 응 가고 있어, 아니, 정도로 짧고 간결해졌다.  

  엄마가 어버이날 원했던 것은 거창한 게 아녔을 것이다. 엄마는 내게 진심을 원했었다. 그냥 딸의 마음을 보고 싶어 마냥 기다리기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진심을 글씨로 새기기로 했다. 맞춤 케이크를 알아보던 중 케이크에 상장 형태로 글씨를 쓸 수 있는 전문점을 발견했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일한 돈을 꽃과 함께 투명 홀더에 둥글게 말아 상자에 담았다. 비누꽃 모양의 작약에서 환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영화 속에서 주연 배우를 기다리는 감독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준비를 다 하고 나니 엄마가 퇴근할 시간이 다 되고 있었다. 엄마 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매 년 변했던 엄마에 대해 떠올렸다. 나는 십 대에서 이십 대 초반까지 유치원생 아이처럼 엄마에게 곧잘 내가 느낀 감정들을 조잘조잘 말하곤 했었다. 그런데 대학교 졸업을 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공백기가 길어지며 많이 변했다. 성격도 바뀌고, 많이 위축되고 말 수도 줄어들었었다. 아마 내가 힘들어 한 만큼 엄마는 흘러나오려는 감정들도 꾹꾹 눌러 삭이고 있었겠지. 


엄마를 위해 편지겸 케이크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름이 나와서 모자이크했어요.
  스텐바이 큐, 오늘 주인공은 당신 엄마의 생일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처럼, 사방을 어둡게 하려고 불을 꺼놨다. 또각또각 띵동 주인공인 엄마가 피곤함이 가득한 발걸음을 끌고 왔다. 엄마는 내가 준비한 생일상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7월 28일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라는 살가운 말과 함께 엄마를 꽉 끌어안았다. 영화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어야 좋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면 안 되는데 ……. 엄마가 운다. 케이크에 쓰여 있는 감사장의 글자들을 한 참 동안 쳐다보며 소리 없이.  이토록 감동받았나, 내가 그동안 엄마에게 참 많이 해준 게 없구나 싶었다. 나는 항상 언젠가 성공해서 뭔가를 해줘야지 라고 했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엄마에게 내가 무엇을 해서 행복하게 해 줬냐는 거였다. 근사하지 않아도 돈이 많이 들지 않아도 괜찮은 것. 남들과 비교하면 내 것들은 한없이 낮아진다. 지금 빛나는 건 엄마와 나 사이에 빛나는 눈 맞춤 그 안에 피어있는 진심이었으니까. 그거면 됐다. 엄마의 이름처럼 아름다울 미, 경치 경, 아름다운 풍경으로 생일이 장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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