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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Jan 10. 2020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어느 취업 준비하던 겨울날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줄여서 아아. 이름하여 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 얼죽아다. 눈이 올 때도 언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은 습관이 돼 버렸다. 출근 전, 일하기 전, 회의 전 무언가를 하기 전……. 급하게 뭔가를 할 때가 되는 찰나에 커피를 찾는다. 목구멍을 타고 차가운 게 들어가야 일이 빠르게 넘어가는, 커피는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윤활류 같은 것이다. 아니 차가운 아메리카노 이건 어쩌면 자존심이다. 매서운 겨울에도 나는 전혀 굴복하지 않아 라는 대항이다. 나는 빨대로 얼음 가득한 아이스컵을 휘휘 젓다가 쭈욱 들이킨다.

대학교 다닐 때는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낯선 이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20대 중반도 안 되는 대학교 선배라는 사람은 ‘인생의 쓴 맛을 알 때 너네도 아메리카노 맛을 알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했다. 몇몇 친구들은 그냥 흘려 넘겼고 나는 진짜 어른이 될 때쯤 쓴 맛을 알게 될 거야 하는 날이 올까?라고 혼자 되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야 말로 라떼는 말이야의 라떼꼰데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해맑았던 스무 살의 나는 혀로 바닐라라떼에 휘핑크림을 가득 얹어 술이 아닌 휘핑에 달큼함에 취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 친구들은 취업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깔깔 거리며 웃었던 성격이 조금은 무언가 좀 더 차분해졌다. 아기 입맛이었던 나는 편식하던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줄곧 빵과 떡들을 즐겨 먹었다. 그건 바쁜 현대인들을 위한 한 끼 식사이기도 했으며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으면 딱 어울리는 디저트이기도 했다. 아마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대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뭘 해야 될지 모르고 방황했을 때. 서울의 언론홍보학과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언론고시에 뛰어들겠다고 아카데미와 스터디를 병행하며 경기도 집에서 안양까지 멀다면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백수였지만 스터디 카페를 예약해서 뭔가 할 일을 만들어야 했고 내 하루의 소박한 사치는 카페에 들리는 일이었다. 취업스터디를 하면 선생님이나 스터디원에게 뼈 때리는 현실적인 충고를 듣기 마련인데 그때 나는 외모에 대해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하드웨어는 좋은데 살을 빼라니……. 한마디로 팩트 폭격. 영어 점수는 더 높이고 살은 조금 더 빼야 하고 목이 타 들어갔다. 처음에는 패기 있게 시작한 스터디였지만 팀원들의 칭찬을 가장한 말들이 가끔 내 머리를 세게 내리 칠 때가 더 많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일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았다. 갈증이 날 때, 목이 타서 생각할 거리들이 많을 때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으면 그 이전의 생각들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반절 남은 아메리카노와 함께 살을 빼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잊은 채 한쪽 손에는 작은 빵이 들려있었다. 언론고시 스터디는 한 주 두 주를 넘어가고 있었고 그 사이에 계절도 달력과 함께 바스락 소리를 내며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은 밖에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눈을 맞으면서도 스터디에 오겠다는 패기와 열정을 가지고 학원에 왔다. 오늘은 또 어떤 혹평을 들을까. 저번보다 내 목소리와 표정, 살은 조금 더 빠졌을까. 학원에 들어서기 전 나는 외쳤다. 내게 자신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킬 때 외치는 커다란 목소리뿐이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일 순간 드라마에서 본 슬로 모션처럼 모든 것이 멈췄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주문을 받던 50대 중반 사장님이 황당한 듯 나를 쳐다보며 웃는다.

 

“네 뭐라고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는데요?”

 


사장님의 물음표와 함께 동공이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하늘로 훌훌 날아가고 있었다. 그 뒤로 참새 몇 마리가 메롱이라고 외치며 날아가는 것 같았다. 깔깔깔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웃어넘긴다. 하지만 사실은 되게 쪽팔렸다. 그래 잘 못 말할 수도 있지 뭐. 그날 눈이 정말 많이 와서 눈을 털어내다가 말이 헛 나왔나? 너무 추워서 호기롭게 말하려다 그랬나 보지 뭐 애써 나를 다독인다.

실제로 나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본 적이 있다. 하루는 처음 가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잘 못 듣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내주었다. 처음 일하는 카페 아르바이트 생 같았는데 차가운 것을 달라고 하니 뜨거운 것에 얼음 몇 개를 넣어 희석시켜 주었다. 사실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밍밍한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이제는 쌉싸름한 원두의 첫맛, 끝 맛을 제법 살필 줄 아는 삼십 대가 됐다. 가끔은 기분이 우울할 때 가라앉는 모습을 상기시키고 싶을 때 습관처럼 카페에 간다. 어쩌면 카페에 가면 나는 고소한 디저트 향이 맡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럼 예전에 일어났던 재미난 기억들이 그물망에 엮인 고기들처럼 따라 올라온다. 그 기억들은 아가미를 헐떡이는 활어처럼 잠시 파닥이며 나를 웃게 해 준다. 칼바람이 분다는 차가운 오후다. 내 오른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있다. 이건 매서운 바람에 꺾이지 않기 위해 계절에 대한 무언의 항쟁일까. 끓어오르는 화나 갈증을 식히기 위해 쭈욱 들이킨다. 아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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