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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Jan 16. 2020

겨울의 향수

서른한살에 향수시향 알바를 했다


  2019년 10월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이년동안 버티다 퇴사를 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뭔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개월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아니 어쩌면 한 달도 안 돼서 뭐하고 살지 라는 생각이 물꼬를 텄을지도 모르겠다. 서른한 살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라는 마음 가득히 밀려오는 물음표를 따라가 보면 그 뒤에는걱정 불안 초조함이 함께 머리너머로 떠올랐다. 나는 뭐라도 해야지 하고 마구 알바 구직 사이트에 내 이력서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침 혼자 끙끙대며 앓다가 단기아르바이트 대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게는 반가운 전화였다. 첫 물음은 “향수 판매 해보셨어요?” 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당장 사람이 필요해서 투입되어야 하는 아르바이트 였기 때문에 빠르게 본사에 가서 향수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사실 향수라 하면 나는 누가 선물해주는 소모품, 지나가다 너무 좋다 혹은 세다에 뒤 돌아보는, 사람의 발걸음을 잠깐 멈추게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육 때 알았는데 화장품 중에 제일 만들기 어려운 게 향수라고 한다. 그리고 글과 말로 풀어내기 어려운 것도 향의 느낌과 감각을 표현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판매한 향수는 사계절과 모 유명 작곡가의 클래식 컨셉에서 가져온 네 가지 느낌의 총 여덟가지 향수였다. 여성적인 플로럴한 향수부터 상큼 발랄한 시트러스한 향, 진한 장미향이 나는 향, 우디한 향등등……. 몇 가지 없어보여도 타겟층과 향의 느낌이 제각각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사무직 내근일을 하다가 처음 해본 시향일은 사실 쑥스러웠다. 처음에는 대행사 직원이 먼 발치에서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에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꼭 전회사 팀장이 빠르게 눈알을 돌리며 나를 쳐다보는 모습 같기도 했다. 키가 멀대같이 큰 실장이라는 사람은 나를 금방 채용해놓고서는 실시간으로 카톡을 보냈다. 지금 판매량이 어떠냐 몇 개 정도 나갔는지 체크를 해 봐라. 내가 숙지한 향수가 맞는지 제품을 확인하려고 하기도 전에 손님이 와버렸다. ‘이 향은 뭐에요?’ 라고 물었는데 모르고 다른 제품의 향을 말하기도했다. 손님은 “음 말한거랑 향이 좀 다른 거 같기도 하네요” 라고 대답했다. 처음에 몸이 쭈뼛쭈뼛 했다. 하지만 곧 큰 소리로 향수를 홍보하고 시향지를 나눠 주다보니 한 시간이 뚝딱 가 있었다. 집에서 혼자 누워있을 때는 시간이 정말 안 갔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왼쪽 손목에 뿌렸던 플로럴향 향수와 오른쪽 손목에 뿌린 우디한 향수가 섞여 있다. 그리고 그 향들은 공중에 흩어졌다 다시 모여서 이름 모를 또 다른 향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 베토벤도 모르는 의문의 향일 것이다. 런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향수라 사실 사람들의 관심이 엄청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갔고 향수는 팔렸다. 가격이 비싸다며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와 시간을 떼우러 잠깐 들르기도 했다. 고등학생, 갓 대학생 손님도 있었고,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도 많았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향수코너에 오지 않아 시향지에 향들을 묻혀 직접 나눠줬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명함을 주듯이 향을 전달하자 코 끝에 갖다 댄다. 여기서 부터는 복불복이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향을 찾아온다. 센 향들은 하루 이틀이 지나서 잔향을 맡고 찾아오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교육을 받으며 세고 무겁다 느낀 향수가 여성고객들에게 제일 잘 나가는 향수였다. 신기했다. 첫날 대행사 실장이 판매실적을 묻는 카톡에 당황하면서도 내가 향수를 팔았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두 번째 날은 좀더 유연하게 매장을 왔다갔다 거리며 사람들에게 향수코너로 유도하며 시향지를 나눠줬다. 향수 근처에 있는 바디로션이나 헤어 제품을 보는 사람에게는 조금 더 크게 나중에는 입에 붙을 수 있는 멘트로 큰 목소리로 말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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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간 향수냄새를 지긋지긋하게 맡았다. 남자친구는 업무 특성상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해서 일부러 크리스마스를 끼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사실 뭐하러 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냐 싶겠지만 내게는 새로운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계속 할 수 있는 힘 같은 것 말이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퇴근하면서 옷에 향수 향이 배일 지경이었다. 발은 낮은 로퍼를 신었는데도 퉁퉁 부었다. 샤워를 할 때 물줄기가 뒤꿈치에 닿았는데 쓰라렸다. 뭔가 하지 않은 날 보다 뭐라도 해서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나를 감시하던 실장이 꼭 전회사 팀장님 같은 생각에 회사생각을 십 초정도 했다가 생각의 회로를 바꿨다. 그래 어찌됐든 난 어제보다 잘했어. 그날 뿌린 향수는 향기로 나를 기억한단다. 글로 남긴 오늘이 나를 기록하는 것처럼. 시간은 돌아가고 어찌됐던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조금 느슨하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 지나간 시간 앞으로 올 내 30대의 시간에 대한 불안함 보다 어떻게 나로 살아갈 것인지 좀 더 느슨하게 대처해보기로 말이다. 짧은 향수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금 내가 살아가는 31세의 겨울향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너무 날서있지도 둥그렇지도 않은 살짝 마모된 모양, 향은 세지 않고 은은하게 퍼졌다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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