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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Jan 21. 2020

탈색은 탈피하는 과정이다

2018년 11월 겨울 탈색을 처음 했다

탈색은 탈피하는 과정이다     

국어사전에서 탈피를 검색해본다. 껍질이나 가죽을 벗김. 완전한 탈피를 위해선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사전적인 뜻이 뜬다. 2018년 서른 살이 되던 해 11월 처음으로 탈색을 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애쉬 계열 색으로 염색해 보기는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무렵 웹에이전시를 나와 해설 작가 업무일을 시작한 지 딱 일 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창밖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언 손을 핫팩으로 꼭꼭 눌러 추위를 녹이고 있었는데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뭔가 새롭게 마음을 다 잡고 싶어서 무작정 동네에 있는 싸고 여러 번 탈색할 수 있는 미용실로 찾아갔다. 탈색 무제한이라는 글자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용실에서는  원하는 색깔 나올 때까지 탈색이 가능하단다. 색이 나올 때까지 탈색을 하게 되면 머리가 상할 수도 있고 머리 끝 부분이 녹아내릴 수도 있기 때문에 사전에 미용실 책임이 없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미용사가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에이포 용지 한 장 가득 글씨가 빽빽했다. 머리가 녹아내려도 미용실에서는 책임 을지지 않습니다. 처음 하는 탈색이기도 하고 내 머리는 숱이 많은 편에 단단하다고 생각해서 금방 사인을 했다. 서른인데 좀 더 나이 먹기 전에 해 보고 싶은 리스트 중 하나인 탈색. 그동안은 기분전환으로 염색을 한다고 했지만 머리에 최대한 잘 입혀지는 색으로 했다. 아니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회사가 그렇듯이 예술계를 제외하곤 일반 회사에서는 밝은 애쉬 색들을 쉽게 할 수 없었다. 탈색 서명란을 세네 줄쯤 읽고 난 뒤 싸인을 해보렸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에서 검색을 해 평소 하고 싶었던 애쉬 바이올렛 색을 미용사에게 보여줬다.





  탈색 약은 염색약보다 많이 따가웠다. 아침 10시쯤 왔는데 점심때쯤 되자 탈색 두 번을 끝냈다. 두피 사이로 뭔가가 들어온 것처럼 따가웠다. 따가운 기운은 한참 지속됐다. 뾰족한 날이 머리 사이를 긁어 내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과정이 이런 건가. 색이 이 밝은 주홍빛을 뜨고 있었다. 이제는 아픔을 넘어서서 아픔이 나왔다. 밝은 색으로 머리색을 바꾸는 건 반나절이 걸렸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날 사람들은 머리를 한다. 파마나 염색, 하지만 아예 색을 밝게 해서 탈색을 한다는 것은 내게 파격적인 변화였다. 그건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니까 해볼 수 있는 특권 같은 것, 그래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이어서 해봐야겠다는 일종의 대항이기도 했다. 스물아홉에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지루해질 무렵 그쯤이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고, 머리는 어느덧 세 번째 염색약을 바르고 있었다. 연기와 중화제 그리고 덧바른 약들의 냄새가 코끝을 적셨다. 창밖으로 해가 보였다. 멀리 쌓여있는 네모난 가게 건물들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탈색이 끝났다. 미용사가 젖은 머리카락을 끝까지 손가락으로 눌러주며 말려줬다. 마치 뱀이 껍질을 벗는 것처럼 새 머리로 탈피되는 순간이었다. 탈피는 또 다른 성장이라고 한다. 크고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 애벌레나 도마뱀, 뱀이 시기가 되면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나온다. 어느새 탈색한 머리가 애쉬 계열의 퍼플색으로 또렷하게 나왔다. 나는 거울을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여전히 두피가 따가웠고, 머리를 감을 때 보라색 물이 흘러나왔지만 새로운 것을 해봤다는 생각에 회사를 갔을 때 팀장과 주변 사람들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방송국이라 머리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꽂혀있었다. 팀장은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마디 건넸다.




“너 아이돌 할 거니?”

원래 비아냥 거리는 사람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새로운 탈피를 위해 나는 또 다른 버킷리스트 계획을 한 가지씩 세운다. 달력의 끝자락을 기념하며. 달력의 처음을 기념하며. 신년이 지나서. 갖가지 이유를 붙이며 신선한 도전을 한다. 가끔씩 이런 도전은 용기를 준다. 직장생활이 답답할 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한 가지씩 용기를 내보자. 한 번씩 내 모습을 탈피해보는 과정을 겪다 보면 마음의 모양이 1그램 2그램 조금씩은 커질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그, 중요한 때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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