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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Jan 22. 2020

“퇴사는 쿠폰을 남기고”

회사에서 커피를 마시던 어느 가을

“퇴사는 쿠폰을 남기고”

오래된 노래지만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제목처럼 떠나간 사람의 자리에는 발자취가 보이기 마련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어떠한가.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자연은 잔상을 남긴다. 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여름에 등줄기를 두드리는 열대야 기운, 가을에 피어오르는 선선한 햇살에 살랑이는 바람 한 스푼 겨울, 코끝을 맴도는 부서지는 겨울바람이 하늘을 정처 없이 할퀴고 다닌다.   

2019년 그 해 가을이었다. 나는 퇴사하는 마지막 날까지 책상을 마지막 날까지 정리했다. 집에 가져가야 할 물건들 보다는 버려야 할 서류들이 더 많았다. 처음에는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둘러보다가 지쳐서 여러 장 집어 파쇄기에 집어넣었다. 회사에 입사를 하고 열심히 해야지 한 후에 샀던 마우스패드며 모니터 옆에 둘 인형이나 물건들을 하나하나 집에 갖다 두었다. 쌓인 물건들은 한구석에서 시작을 알리기 위해 놓여있었다. 퇴사 의사를 밝히고 난 후 서류를 정리하면서 작은 종이명함들이 수십 장 떨어졌다. 그동안 사람들과 갔던 식당이며 왔다 갔다 했던 카페 쿠폰들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을 때 상사 앞에서 깨졌을 때도 어김없이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갔었다. 회사에 출근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 회사 동기들과 나만 아는 카페를 만들어 비밀 이야기를 하는 공간을 만들기도 했었다. 






  “오늘은 아무개 대리가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화를 냈지 뭐야 오늘 좀 예민한가 봐.” 

  사원들 중에서도 오래된 선임이 입을 먼저 뗀다. 일도 바빠 죽겠는데 회사 사내교육이랍시며 회의실을 잡은 윗사람들 이야기가 화재가 됐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K 대리가 없는지 괜히 한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갑자기 군기 같지도 않은 군기를 사람들 이야기가 카페에서 오고 갔다. 우리에게 회사 근처 카페란 잠시 몸을 녹이는 곳이 아닌 대피소 같은 존재였다. 갓 구운 빵내음과 버터향이 아지랑이 모양을 그리며 허공 위로 피어오른다. 12시에서 1시 사이 카페 사장님은 웃으면서 늘 먹던 메뉴를 준비해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는 씨엠 쏭처럼 늘 먹던 것이라는 메뉴가 눈 한번 마주치면  맞은편으로 전해진다. 흰 집이라고 불리던 카페는 사장님이 만드신 바닐라 수제 시럽 때문에 라테 메뉴가 인기가 많았다. 무엇보다 우리의 비밀 이야기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시면서 가끔씩 용기 한 스푼을 넌지시 얹어주는 그 다정함이 우리를 카페로 오게 했다.



  “그래서 회사는 참 힘든 것 같아요.”

  “그런 사람 꼭 어딜 가나 있어요 힘드시겠어요.”

  “오늘은 금방 만들어서 더 맛있어요. 잘 저어 드세요”





  나는 매일 아메리카노를 먹는 게 습관처럼 먹었지만 흰 집 카페에서는 자연스럽게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마시곤 했다. 여러 명이서 올 때는 도장 몰아주기를 해서 쿠폰을 합치기도 했고, 없는 날은 가게에 두고 다니는 쿠폰에 이름을 써 도장을 찍었다. 아메리카노가 당기는 날에는 고소한 원두가 있는 길 건너 신호등을 건너 걸어 나오는 허름한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 그대로 가성비 좋고, 회사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곳, 하지만 조용하면서 커피맛이 좋은 곳, 회사생활을 하면서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이곳 원두 또한 달달하고 고소한 것이 내 입맛에 제격이어서 자주 방문하곤 했다. 하루에 많게는 다섯 잔 커피를 마시는 내게 커피는 안식처였고 도피처였다. 완전한 사생활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사장님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커피로 이야기했다. 특히 흰 집 카페에서 커피 한잔에는 멘트 속 다정한 안부 한 스푼이 묻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커피 쿠폰들……. 실은 동료가 하나둘씩 퇴사를 하며 자리를 정리하면서 내게 쿠폰을 나눠준 것과 섞여있었다. 줄 건 없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 마시라며. 모아놓은 커피 쿠폰을 주는데, J의 손이 가벼웠다. 이제 다시는 안 올 것처럼 짐들을 터는 듯한 느낌. 동료들의 퇴사 릴레이의 바통터치를 받은 나도, 다음 사람을 위해 쿠폰을 넌지시 준다. 수많은 도장들이 그동안 내가 왔다 갔다 움직였던 마음처럼 찍혀 있었다. 이제 정말 떠나는 구나를 외치며 마지막으로 카페에 들러본다. 회사에 인사는 대충 해도 내가 갔던 근처 음식점, 카페 사장님들께 인사를 해본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사장님은 그런 내 얼굴을 기억해주며 덤으로 간식을 주고, 명함을 준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이 뭉근하게 가슴에 젖어들어온다. 나는 짐을 챙기고 한번 더 카페 쪽으로 몸을 돌려 카페 향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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