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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Sep 28. 2020

철이든 밤

누구에게나 익는 시기가 있다.

  

  할머니와 아빠가 작대기로 밤을 떨어뜨린다. 아홉 살의 나는 밤톨위에 발을 짓이긴다. 밤이 여러 개 나왔다. 미끈한 밤 알갱이를 손에 쥐고 있다가 아빠의 모자를 뺏어 그 안에 넣었다. 고작 밤 알갱이인데 나는 기분이 좋아 방방 뛴다. 우리가족은 주말이면 외할머니가 일궈놓은 밭으로 놀러오곤 했다. 그곳에는 고구마며, 감자 또는 각종 나물들이 가득했다. 도심 속 안에 있는 밭이었다. 밭의 반대편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가 있고 다른 한쪽은 티비 속에서 볼 법한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시골풍경이 펼쳐져 있다. 

 뭐가 좋은지 초등학생의 내가 활력 넘치게 밭 사이를 훑고 다닌다. 어떤 곳은 내 허리춤에서 가슴까지 오는 까칠한 수풀들 때문에 약한 내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곤 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내가 깐 밤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할머니는 밤 알갱이를 깐 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밤들이 참 철이 잘 들어가지고 오동통하게 살이 올랐네”

 운이 좋게 옆 밭에 있는 아저씨를 만날 때면 방금 딴 홍시를 내게 선물처럼 쥐어주기도 했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궁금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밤이나 감은 왜 가을철에 따는 거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계절마다 제일 좋은 시기가 있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내 눈높이에 맞게 이야기 해주기 위해 이렇게 대답했다.

  “과일들은 자라나면서 제일 맛있는 때를 알고 있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날 시기를 말이지. 우리가 그 때 그

  것들을 따서 먹는거야”

 할머니는 내가 말썽을 피우거나 말을 듣지 않을 때 언제 철이 들라나 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게 말했었다. 가끔 편식을 하거나 빨래하는 것 밥상 차리는 것을 도와줄 때면 ‘철 들었네 시집가도 되겠어’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지기도 하셨다. 

  


  철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은 꼭 제철이 아니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과일 채소가 많다. 풋과일에 열이나 약품 처리를 해서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제품들도 있단다. 인터넷으로 클릭 한번이면 색 색깔의 과일들을 소량으로도 골라 담아 살 수 있다. 하지만 직접 딴 과일과 그렇지 않은 것은 고유의 빛깔과 향이 나지 않는다.

 얼마 전 할머니와 땄던 밤이 생각나서 쇼핑몰에서 밤을 시켰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밤에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밤이 아니라 그 시절 그 기억을 먹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찬란하게 익는 시기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나는 매일 밤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며 잠을 청한다. 차라리 그 시기를 안다면 누군가가 말해줬으면 좋겠다. 친구 에이는 대학교수가 됐고, 친구 비는 대기업에 과장직을 달고 올 해 결혼했단다. 나이에 맞춰 하는 평균적인 시기도 그 사람이 익는 제일 알맞은 철인 것일까. 자꾸 내 눈이 움찔 귀가 팔랑 거리며 움직인다. 나는 그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지금 이 순간 연필로 줄그어진 연습장에 내 상념을 꾹꾹 눌러 담는다. 누군가 내게 뭐하는 사람이냐 물으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오후에는 학원 데스크 일을 하며 최소한의 생계 유지비를 벌고 있다. 누군가는 글 쓰는 건 취미 아니에요? 학원데스크가 본업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밤 알갱이를 덮는 가시처럼 아플 때가 더 많다.  누구에게나 영그는 때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인위적인 때가 아닌 밭에서 갓 딴 열매에 묻은 흙냄새처럼. 나의 철을 찾기 위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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