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고 휴직을 하라고?

커리어냐 육아냐, 그것이 문제로다.

by 서윤

입사 8년 차. 과제 리더를 맡아 후배들을 이끌고 주도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한참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기여가 가능한 ‘짬’을 장착한 연차였다. 그간 몸으로 익히고 귀동냥으로 들으며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고, 협력 업체와의 미팅도 무리 없이 이끌어 나가며 내가 빠지면 회사가 안 돌아갈 것 같은 그야말로 엄청난 착각에 빠졌던 때였다.


일 년 후면 진급 대상자가 되는 연차이기에 올 한 해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고 좋은 고과를 받아 입사동기들과 나란히 진급 축하주를 기울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코스의 직장 생활을 순탄히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첫째 출산을 몇 개월 앞둔 임신 중기즈음에 남편이 건넨 한 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자기가 휴직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보고 휴직을 하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뼛속부터 P(인식형) 성향이 강한 나에게 출산 후 아이 양육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양쪽 부모님 도움을 받으면 좋고, 정 안되면 베이비 시터 이모님을 구해 보는 막연한 대비책 정도만을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한테 휴직을 하라니?

그렇게 말하는 남편에게 무척 서운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나에게 펼쳐질 상황이 너무나 예상이 되었기에. 진급 앞두고 올해 고과 잘 받아야 하는데, 과제 리더로서 한창 열심히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는 어쩌고 휴직을 하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 말 한마디를 던진 남편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본인의 일이었대도 나에게 의연하게 던졌던 말과 똑같이 결정할 수 있을까? 아마 자기 일이라면 못 했을 것 같은데, 남-아무리 부부라지만 내가 아니니까- 의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섭섭한 마음으로 시작해 몇 날 며칠을 곱씹어 생각하니 남편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열심히 일 잘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고과 잘 받으며 탄탄대로를 나름대로 가고 있는 중인데, 내가 왜 휴직을 해야 해?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 나보다 조금 더 판단형(J)에 가까운 성향인 남편의 생각은 나름 확고했다. 친정과 시댁, 양쪽 어머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돌까지만이라도 엄마가 돌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법으로 보장되는 육아 휴직 제도가 버젓이 있고, 이를 활용해서 1년간, 엄마인 내가 육휴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최선이겠다는 결론이란다.


그러나 그때는 2010년. 여자 선배들과 내 동기들 중 결혼을 일찍 하고 임신을 한 사람들은 모두 다 퇴사를 선택했다. 그래서 육아휴직을 사용한다는 건 나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제도는 있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같은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구 하나 쓸 생각을 안 하는, 아니 못하는 1년 육아 휴직 제도. 그걸 나보고 쓰라고 제안해 온 남편이 처음엔 어이없었는데, 그날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육아휴직 1년을 사용하게 된다면 내가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 얻게 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출산을 코앞에 두고 육아휴직서를 찾아들고 부서장 면담을 했다. 부장님의 첫 반응은 역시나였다.


회사 그만 다닐 생각이야? 아까운데?
지금 중요한 시기잖아. 잘 생각해 봐.


나도 너무나 잘 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지난 2년간 내가 공들여서 만들어 온 자료들과 노하우들이 쌓인 덕분에 회사 내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분야에 관한 한 내가 전문가가 되어 자리 하나 꿰차고 있었는데.. 곧 성과로도 이어질 것이 눈에 보이는 중요한 타이밍이었는데...

하나하나 모으고 손수 만들어 정리해 왔던 모든 자료들과 프로젝트를 고스란히 다른 동료에게 세트로 넘겨주고 나는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나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니, 지금의 부장님은 그때의 내 심정과 같았으리라.


네, 저도 잘 아는데, 달리 아이를 키울 방법이 없어서요. 중요한 시점에 휴직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부장님.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나의 커리어를 걱정해 주시는 부장님의 근심 어린 한숨을 뒤로하고 나는, 출산휴가에 붙여서 육아 휴직을 사용했다. 우리 부서 최초의 육아 휴직 1년 사용자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그 결정이 있기까지 마치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마음으로 육휴 사용을 고민했었다.


회사 일도 물론 중요하고 나의 경력도 중요하지만 일 년이란 시간은 직장인에겐 쏜살같다. 잠시 육휴 사용하고 돌아온들, 입사 동기들보다 진급이 몇 년 늦어진들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크게 뭐가 달라질까? 아이는 신이 주신 선물인데, 나에게 찾아온 이 선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육아휴직으로 인해 동기들보다 늦게 진급한 만큼 나는 일,이년 더 다니고 퇴사하면 되지. 하지만 내 아이의 생후 1년이란 시간은 지금 지나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거잖아.


육아 휴직에 대해 사고 회로를 이렇게 돌리니 처음에 남편에게 느꼈던 서운했던 감정이 서서히 누그러지고 어느 순간 순리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그래왔다는 이유로 생각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여과 없이 받아들이던, 관례라는 이름의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니 아직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선택할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의 ‘1년 육아 휴직’은 부서 내 예비 엄마들을 포함한 구성원들에게 선례가 되었고, 출산을 앞둔 후배들도 육아휴직을 붙여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동기들보다 한참 뒤에 진급을 하게 되었지만, 그 사실이 속상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오랜만에 모인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를 위로하려는 친구에게 농담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너희들보다 회사 1-2년 더 다닐 수 있어! ”


진급 누락. 전에는 어마무시하게 다가왔던 단어였는데, 막상 겪어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순리 아닌가. 대신에 나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의 성장을 손 닿는 거리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 이보다 값진 경험은 없다고 자신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부서 최초의 1년 육아 휴직 사용자가 될 것 같다. 나의 신념을 바탕으로 한 최선의 선택. 남들이 가지 않았기에 어찌 보면 큰 일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사소한 일인 그것을 나는 또 다시 선택할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