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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Oct 26. 2023

그리고 숲에 놓였다

단편소설

너를 처음 만나고 이듬해 무더위 속 정오, 그 해의 무더위는 단순한 무더위가 아니었다. 무더위의 처음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매우 매우 무더운 무더위였다.

 하나, 우리가 함께한 그 숲은 마치 한 잔 가득 무더위 속에 빠져있는 얼음덩어리 같았다. 복사뼈가 시릴 만큼의 차가운 계곡과 얼음 절벽, 그리고 키가 아주 큰 나무들이 가득 차 있었고, 덕분에 그 숲만큼은 더위와 습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 얼음덩어리 안에서의 너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어떻게 그럴싸하게 말을 하면 너의 그 조막만 한 볼살을 슬그머니 만져볼 수 있을까, 얕은 계곡과 짙푸른 이끼 숲을 지나며 내내 그 생각만 했다.

 계곡물에 젖은 치맛단이 진득이 들러붙어있는 가늘고 흰 종아리, 그 선을 따라 올라 봉긋한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 잔잔한 강물같이 넘실거리는 너의 수면에 나도 모르게 손끝을 담그려던 찰나. 앞서가던 너는 총총거리던 발걸음을 이내 멈추고 활짝이 돌아보며 말했다.


 ’ 손을 잡아’


 그녀의 손을 잡자, 순간 우리는 부ㅡ웅 하고 떠올라 숲의 끝까지 단숨에 날아갔다.

 그녀의 손을 놓치면 이곳에 영원히 갇혀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을, 그녀의 손을 아주 꼭 잡았다. 귀가 먹먹해지더니 이내 앞이 안 보일 만큼 머릿속의 압력이 높아져, 정신이 혼미한 건가 싶을 때 즈음

 툭,

 발이 닿은 곳은 그 어디에도 없는 숲의 끝이자 그 무엇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만큼 환희에 찬 공간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 나는 나의 아름다움이야.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 중 하나야. 넌 너의 어리석음이야. 너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 중 하나지’


라고 금방이라도 파스스 깨질 듯이 아름다운 그녀가 말했다.

 말을 내뱉는 입술 역시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분명 나의 정면에서 말했지만 소리는 등 뒤에서 울려왔다.

 순간 그 아름다움과 너무도 상반되는 존재가 시퍼렇게 날 선 면 뒤에 숨어 그녀와 나를 노릴 것만 같았다. 내 안의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얼어버리는 돌처럼 얼어버리는 느낌이 소름 끼쳤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 우리의 본체인 우리는 그 어디에도 없어. 또는 어딘가에서 살고 있어. 난 진짜 나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어 그러니 너도 이제 진짜 너에게 가. 그곳에선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찾아야 해. 기억해. 기억해’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뒤, 뒤돌아선 그녀의 모습은 모종의 깃털 같았다. 아주 여리지만 질긴 깃털, 솜털이 잔잔히 빼곡한 깃털, 그 깃털은 이내 사라지고 내 발이 닿았던 공간은 적당한 어느 시골 읍내의 은행 안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은행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실의 노인 요양 보호사라고 밝히는 편이 실상에 더 가까울 만큼 이곳은 고령자들의 무더위 쉼터이자 동전교환소이자 무료 다방이었다.

 나는 늘 뭔가 골똘히 생각한다. 대출 상담석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짓는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해야 한다는 것만 떠오르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멍청히 앉아 있다 보면 할아버지의 호통소리에 정신이 번뜩 깬다. 은행이 있는 골목 입구에 자리한 건강원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동전을 바꾸러 온다. ​9시가 된 것이다. 은행 문이 열리고 업무가 시작된다. 오전엔 지폐를 동전으로 교환하는 업무로 열을 올린다. 읍내의 모든 가게 사장들이 동전을 바꾸러 온다. 100원짜리 50개 묶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목련 다방 할머니가 오셨다.


“어머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나는 인사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며 입을 다문 채 말씀하셨다.


 ’ 기억해, 기억해, 기억해.......’


 한참 잔 것 같은데 20여 분 밖에 안 흘렀다. 기계 소리가 요란하고 뭔가 굴러가는 소리, 앓는 소리, 뛰는 소리 긴박한 소리들이 주변을 채우고 있다. 혈색소 수치가 내려감과 동시에 눈앞이 흐려 보이기 시작한다. 내 또래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섬망, 아버님, 할아버지, 상조. 간신히 몇 가지 단어만 알아들을 수 있다. 단어들이 잘게 부서져 피부에 박히는 바람에 온몸을 긁고 싶다. 그러나 바위에 눌린 몸은 당최 손 하나 까딱할 도리가 없다.


 언젠가 확실히 느껴본 듯한 두통이 느껴진다. 귀가 먹먹해지더니 이내 앞이 안 보일 만큼 머릿속의 압력이 높아져 정신이 혼미한 건가 싶을 때 즈음

툭,


 발이 닿은 이곳은 어떠한 기억의 단면이다. 기억의 단면은 몹시도 거칠었으며 붉은 진액이 숭숭히 배어 나오고 있다. 진액이 온 피부로 스며들며 모든 것이 기억난다. 나는 어리석었고 나의 본체를 찾지 못했다. 그녀 또한 찾지 못했다. 나는 어리석었고 내 피부는 기억한다. 나의 본체를 찾지 못했고 그녀 또한 찾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숲에 놓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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