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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기엔 너무 아까운

by 혜온

50대 주부 미영 님은 상표 상담을 하다가 인생 상담을 하게 된 특별한 케이스이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힘겹게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정신도 체력도 바닥나 있었다.

“지금도 믿기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워요. 그래도 내 가게에 걸 간판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요.”

발명자들은 늘 희망을 가지고 변리사를 찾아온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때만큼은 꿈을 꾼다.

미영 님 역시 그랬다. 그녀는 내가 편했는지 상담에 이어 개인적 사연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자연스럽게 인생 고민 상담이 이어졌다.


그녀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가’였다.

잊었나 싶으면 떠오르고 화가 치밀다가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해진다는 것이다.

“아이가 있어서 이혼은 안 해요. 그렇지만 용서할 수도 없어요. 제대로 용서를 빌지도 않고 뻔뻔한데요 뭘. 정말 어떻게 보고 살아야 할지 너무 막막해요.”

그녀의 깊은 절망이 전달되어 왔다.


굳이 어떤 사건까지는 없더라도 마음속 편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실 나는 한동안 명상 수련에 매진하던 때가 있었다.

요즘 많이 하는 마음 비우기, 생각 알아차리기, 그대로 관찰하기 같은 것이었다.

전문 단체나 프로그램도 기웃거려 봤지만 결국은 혼자 공부해서 나 홀로 수련을 꽤나 오래 했었다. 한번 앉으면 1시간은 기본이고 가끔은 몇 시간씩 버티는 나름 근기 있는 수행자였다. 그때 얻은 지식과 시행착오 그리고 깨달음은 이후 성장에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남편을 고칠 수는 없어요. 그래도 잘못한 점과 상처를 준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로 표현해야죠. 그러나 이혼할 게 아니라면 단죄는 거기까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각자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많은 변수가 있겠지요.”

“맞아요. 억울하고 미운데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요. 그냥 저만 힘든 거예요. 아이 생각하면 빨리 제가 정신 차려야 할 텐데요.”

미영 님은 이성적이었고 뻔한 위로보다는 고통에서 벗어날 해법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그런데 고통 입장에서는 참 억울할 것 같다.

세상에 고통을 반기거나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피하거나 없애려는 사람만 만날 게 뻔하다.

알고 보면 고통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드문데 말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크고 작은 마음의 경보음이 울린다.

한시도 편할 날 없는 것이 마음속이다.

그래서 마음 챙김의 조언이 솔깃하다.

이놈의 마음은 꺼버리면 너무도 좋을 것 같다.

또 얼른 눈치채 바라보고 있으면 꼼짝 못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뭘 어떻게 하든 경보음은 꺼지는 법이 없다.


마음에 경보가 울리고 불편해지는 것을 ‘고(苦)’라 한다.

인생에서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은 싫고 괴롭다.

거기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고통이 경보에 불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꿎은 고통과 싸운다.

경보음에 놀라 경보장치와 씨름하고 있는 셈이다.

그 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왜 경보가 울렸는지는 그 이유는 질문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멀리하고 외면하기 바쁘다.


"미영 님, 혹시 지금 겪고 계신 심적 고통의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배신감이죠. 믿었던 남편이 나를 배신하고 우리 부부의 신뢰관계가 깨진 것이 원인이죠."

"네, 그렇죠. 고통의 원인을 겉에서부터 점점 안쪽으로 하나씩 파고들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미영 님이 해야 하는 건 결국 자신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니까요."


고통은 화재감지 자동 알람과도 같다.

알람을 끈다고 해서 불이 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알람과 싸울 게 아니라 화재와 싸워야 한다.

시끄럽다고 귀를 막고 마음을 먹통으로 만들어 버리기에는 고통이 너무도 아깝다는 사실이다.

고통 앞에서 그저 마음을 비우라는 조언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애써 고통이 만들어준 아까운 기회를 날려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고통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는 마주할 용기를 내어보자.

그리고 날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자. 질문력을 발휘할 때이다.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다른 방법은 없다.


고통의 진짜 이유를 찾아가는 것은 상당히 고난도의 여정이 될지 모른다.

다층적인 원인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원인에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대할 때 외부 변수만 생각한다.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는 것이다.

미영 님은 자신의 고통이 남편의 외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사실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니 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고통은 내가 만든다는 사실 아시나요? 지금 미영 님의 고통은 남편이 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일단 거기부터 얘기를 시작해 볼까요.”

미영 님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빛났다.


여기 고통을 만드는 알고리즘이 있다.

나의 내면을 괴롭히는 이 시스템은 다른 곳이 아닌 내 안에 존재한다.

이 고통 알고리즘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조건에 딱 들어맞는 변수가 입력되면 즉각 작동한다.

고통의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시스템 자체는 주어졌으나, 시스템의 작동 조건은 내가 설계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쌓아 올린 다양한 집착들이 구동 조건으로 세탕 된다.

돈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돈이 사라질 때,

안정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그것이 흔들릴 때 고통이 작동할 것이다.

사람에 집착했다면 그가 떠날 때 고통을 느낄 것이다.

젊음에 집착했다면 늙어가는 것을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설정 조건에 부합하는 사건이 생길 때 고통의 알람은 울려댈 것이다.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내면에 집착이라는 놈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이 고통의 존재이유이자 역할이다.

‘지금 넌 집착을 버리고 성장할 시간이야.’

이걸 알려주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 고통이다.

이상의 내용은 한 인간이 질문력을 발휘하여 알아낸 고통의 해법이다.


석가모니는 명상이나 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는 고통에 대해 원인을 질문했고 치열한 탐구 끝에 사성제, 즉 ‘고집멸도’라는 성장 사이클을 밝혀냈다. 사성제는 고통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그 원인을 멸함으로써 한 단계 성장하는 방법이다. 그 과정을 그는 3전 12 행상으로 표현하고 그 길을 가는 방법이 ‘중도’ 임을 강조했다. 이것이 초전법륜경, 석가모니 가르침의 핵심이다.


“고통은 내가 평소에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소중한 신호입니다. 미영 님이 남편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 미영 님은 남편에 대한 기대와 집착이 컸다는 얘기죠.”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부부인데 그건 당연한 기대 아닌가요?”

미영 님의 항변은 타당하다. 그게 보통의 삶이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사건이 터지고 고통이 찾아왔다는 것은 과도한 집착이 있다는 신호예요. 이제는 변화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남편에 대한 집착이 어디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한번 내면을 살펴보시죠. 고통이 찾아온 게 아니라 성장의 기회가 온 거라고 생각하시고요.”

“큰 욕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힘든 나를 보면 분명 집착이 크긴 했나 보네요.”

미영 님은 금세 납득하고 집중했다.


“우리는 그저 늘 지금 같기를 바란다면서 다른 욕심 없다고 해요. 그러나 그게 가장 큰 욕심이거든요.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요. 고통을 통해 어리석은 내 집착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바람을 피웠다면 신경도 안 쓸 일이 내 남편이 그러면 죽을 만큼 힘들잖아요. 고통은 반드시 내 집착하는 거에서 시작됩니다.”

“고통이 오면 질문을 시작하세요. 그러면 내가 집착하는 대상의 실체를 볼 수 있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사람은 집착을 버린 만큼 성장한다고 해요. 실제로 고통에서 성장을 이뤄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고통에 감사한다고요.”


아는 것 같아도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질문하고 파고들지 않으면 정확히 알 수 없다.

정확히 알아야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친구가 그건 몸에 나쁜 음식이니까 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난 너무나 먹고 싶다.

이처럼 대충 알면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 만일 쥐가 들끓는 곳에서 쓰레기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면 어떨까? 실상을 정확히 알면 욕심은 즉시 사라진다.

완전히 알면 벗어날 수 있다. 잘 모르니까 환상을 갖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고통스러운 이유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던 뭔가를 잃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과연 내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실상은 욕망의 노예이고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에요. 내 인생은커녕 본인 인생도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인 거예요.”

“맞아요. 그냥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정도의 마음으로 살았다면 지금 훨씬 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오히려 평소에 작은 배려에도 감사할 수 있었겠죠. 그랬다면 사이도 더 좋았을 테고...”


고통의 시간은 질문력의 무대이다. 인간에게 성장을 권하는 신의 선물이다.

‘왜 이런 시련이 지금 내게 왔을까?’

고통의 의미를 묻는 이 초월적 질문은 아주 특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만일 고통 때문이라면, 굳이 마음을 비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멍 때리거나 명상으로 허비할 시간도 없다.

비워야 할 건 따로 있는데 애꿎은 사고만 방해하기 십상이다.

그러기엔 고통이 너무 아깝다.

그냥 빈손으로 남기엔 내가 치른 대가가 너무 크지 않은가.

무엇보다 지금 미뤄둔 알람은 다음엔 더 요란하게 울려댈 것이다.

“배우자에 대한 집착은 보통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요. 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체가 그 안에 담겨 있다고 해도 될 만큼요. 미영 님도 이번 기회에 그 무서운 집착의 뿌리를 적당히 가지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나 고통을 겪었는데 소득은 확실히 챙기셔야죠.”

“네, 파헤쳐 볼게요. 대물을 건져 올릴 거 같은데요. 아무튼 저도 나중에 진심으로 고통에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미영 님의 입에서 고통과 감사라는 단어가 함께 나왔다. 그녀는 이미 고통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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