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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할 바엔 차라리 잠을 자라

by 혜온


20세기 이후 실존주의적 개인주의와 자기 계발 사상의 흐름 속에서 자기 긍정의 철학이 등장했다.

‘인간의 마음가짐이 현실을 바꾼다’는 믿음을 중심으로, 감정 조절과 자기 확신을 강조하는 사조이다.

노먼 빈센트 필, 루이즈 헤이, 그리고 이후 뉴에이지나 ‘시크릿(Secret)’류 사고법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당신이 믿는 대로 응답한다. 그러니 현실을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좋은 면만 보라’,‘외부의 문제를 부정적으로 보면, 그 부정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긍정의 힘(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 계열의 사상은 자기 긍정을 넘어서, 종종 세계·타인·상황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까지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초기에는 “내가 나를 긍정하라”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세상 모든 상황을 긍정하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걸 한마디로 하면,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럴 수 있지’가 된다.

참 성격 좋은 말들이다.

과연 누가 이걸 비판할 수 있을까.

이런 관용이 어떻게 질문력을 도둑질한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실제로 학부모 상담을 해보면, 놀랍게도 ‘왜?’라고 묻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왜?’라는 질문이 마음을 혼란하게 하면 어쩌죠?”

학부모 현주님의 질문이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생각을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노먼 필이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긍정 철학에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긍정 철학은 사실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순응하는 ‘소극적 긍정’과 변화에 대한 긍정적 확신인 ‘적극적 긍정’이다. 전자는 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론으로서의 긍정을 말한다. 후자는 욕망의 성공학이다.


‘넌 꼭 잘 될 거야’

우리가 살다 보면 누군가의 응원의 한마디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요리할 때 마지막 순간 약간의 MSG가 필요할 때처럼 딱 1% 부족한 그 순간, 진가를 발휘하는 것들이 있다.

긍정이 바로 그렇다. 응원이 필요한 순간에 그것을 스스로에게 바로 해줄 수 있으니 참 편리하다. 그러나 거기엔 정량이 있고 타이밍이 있다. 그걸 모른다면 긍정은 독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긍정이 주는 약간의 순기능이 있지만 이건 꽤 다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독은 독인데 잘 쓰면 약이 되는 뭐 그런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냥 모두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이제는 아예 상식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그 결과, 학부모 현주님은 아이에게서 질문력보다 긍정의 힘이 사라질까 봐 더 노심초사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이 긍정의 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긍정이라는 재료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아보자.

'소극적 긍정'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틀렸으면 틀린 대로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성인군자라도 된 듯 세상 속 편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소극적 긍정의 순기능은 욕망을 제어하고 만족의 임계치를 낮추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사용한다면 더없이 좋을 재료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질문력은 멈추고 만다.

문제를 찾기보다는 답습하게 하고 자신과 세상의 문제에 눈감게 한다.


인간은 질문력을 통해서 문제를 찾고 메타사이클을 작동시킨다. 그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한층 성장한다. '무조건 긍정'은 문제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성장의 포기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긍정에 빠지는 이유는 사실상 긍정의 모습이 우리가 추구하는 정답 같기 때문이다. 욕망, 고통 그리고 성장, 그 끝에는 집착 한 점 없는 초긍정이 있고, 자신의 긍정을 그것과 동일시하는 의식이 존재한다.


"인간의 성장과정을 먼저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질문력을 통해서 탐구할 때 비로소 고차사고를 하게 돼요. 질문력은 문제를 찾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그런데 긍정 마인드만 강조하면 문제 찾는 힘이 약화되고 말아요. 긍정적인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건 성장 후에 스스로 조절하는 때가 오거든요. 굳이 미리 아이에게 그걸 강조하시면 성장을 막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착한 사람 증후군의 단단함을 안다. 그래서 과연 현주님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교문을 나선다고 생각해 보자.

교문을 나서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등교하며 학업에 매진했던가.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그것이 인정될 때 졸업의 순간이 찾아온다. 마침내 교문 밖을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교문 밖에 나가 서있으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학업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그저 교문 밖에 있다고 해서 졸업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긍정 마인드는 성장의 과정을 마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다.

과정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긍정에만 빠져 있는 것은 미리 교문 밖에 서있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질문력을 막아서고 성장의 기회를 놓칠 뿐이다.


적극적 긍정, 욕망의 성공학은 더욱 까다롭다.

자신의 욕망을 염원하고 확신하면 정말 이루어진다는 신비주의적 성공학 덕분에 요즘 '챌린지'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지고 있다.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희망이 동력이 되어 자신의 목표 달성을 간절히 열망한다. 그러나 그 결과 올라간 건 합격률이 아니라 커트라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챌린지는 경쟁률이 있는 분야보다는 돈이나 독서 또는 다이어트처럼 자기와의 싸움 쪽으로 쏠린다. 그들은 꼭 부자가 될 거라는 열망으로 혹은 몸짱이 되어 바디프로필을 찍겠다는 열망으로 기꺼이 욕망의 포로가 되기를 선언한다.


열망은 곧 집착이며, 집착은 고통을 만든다. 욕망의 성공학은 불나방의 전력 질주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오래지 않아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적극적 자기 확신을 제대로 사용하면 무기력이나 번아웃을 막을 수 있는 훌륭한 재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길 찾기가 먼저다. 이 재료를 제대로 쓰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만일 그 단계를 건너뛰고 무턱대고 사용한다면 평생 시행착오의 늪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인생을 다 허비하고도 뭐가 문제인지 모를 수도 있다.

긍정 철학은 따뜻하고 착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미워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들은 대부분 좋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산업화가 한창인 19세기말까지도 “만족한 바보로 사는 것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로 사는 것이 낫다.”는 철학자 밀(Mill)의 말은 묵직한 울림을 주는 것이었다. 당장은 먹고살기 힘들어도 언젠가는 인간이 지향해야 지점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물질적 풍요가 실현된 20세기에 오히려 ‘초긍정’이 상식이 되어 버렸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불안한 실존들, 정신적 빈곤이 극에 달한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긍정 철학이란, 유일신을 대신하여 실존인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범신론적 메시지라고 보면 거의 정확하다.

과거 종교적 믿음으로 확신과 행복이 충만했던 것처럼 자신에 대한 무한 긍정으로 동일한 확신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철학 사조가 바뀌어도 인간은 그대로다.

이 세계에서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라고 묻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에요. 동물들도 다 각자의 특기가 있고 그걸로 살아가잖아요. 쇠똥구리는 쇠똥을 굴려야 하고,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뚫어야 하고요. 인간도 제 특기를 발휘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스스로 문제를 찾고 질문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이 비판 정신을 잃는 것은 새가 날개를 잃는 것과 같다.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질문력을 막아서는 한, 긍정의 힘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특별한 문제는 없어요.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 아닌가요?”

학부모 현주님은 자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문제를 생각하는 건 방해만 될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경주마의 시야에서 진짜 문제는 보일 턱이 없었다.

‘일체유심조’

석가모니는 불교 철학이 훗날 인간을 배부른 욕망 덩어리로 만드는 데 쓰일 줄 예상이나 했을까.

만일 긍정을 외쳐야 할 만큼 현실이 힘들다면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더 자길 권한다.

치열하게 질문할 인간을 위해 늘 부족한 건 돼지의 긍정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휴식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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