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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는 어디에나 있다.

by 신수현

세금 신고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돈과 숫자에 관련된 일은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무섭기도 했지만, 경리, 회계업무를 처음 접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일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업무를 배우면서 세무사가 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어느 날, 세무사보다 나이가 어린 피부과 원장과의 통화에서 대면하지 않는 자리인데도 허리를 굽혀 통화를 하는 세무사의 모습을 보고 어렵게 고시패스한 세무사의 능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난 시험을 포기했다.

솔직히 시험이 너무 어렵다는 걸 알았던 것도 한몫했다.


강남은 텃세가 심하고 일이 많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기회의 땅이었다.

이직이 잦아 공석도 많았고, 면접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루에 네 번 면접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강남’이라는 말만 들어도 지치기 시작했다.

여직원의 텃세, 일은 미루고 책임만 지게 하려는 세무사들. 조금 낮은 연봉이라도 괜찮으니 경기도에서 일하고 싶었다.


용인에서 만난 세무사님은 나를 많이 가르쳐 주셨다.

틀린 신고서마다 포스트잇을 붙여 주셨다.

처음엔 멘붕이었지만, 메모지가 줄어드는 걸 보며 ‘아, 일이란 이렇게 배우는 거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식대도, 급여도, 연차도 적었다.

3년이 지나 어느 정도 해낼 수 있게 되었는데도, 모든 걸 아끼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봉담으로 이사하며 다시 취업했지만, 두 군데를 다녀본 결과 교통은 지옥 같았고 분위기는 ‘경기도의 강남’ 같았다.

기장과 신고를 백 건 넘게 맡아도 거래처가 줄면 급여도 줄었다. 최저임금을 받은 달도 있었다.


그즈음 세무 일이 싫어졌다.

세무사들이 모두 양아치처럼 보였고, 함께 일하는 동료도 싫었다.

그래서 쿠팡 물류센터 ‘웰컴데이’에 참여했다. 육체적으로 편한 일을 선택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취업이 어려운 시기 무엇이든 해야 했다.

반나절 일해보고 알았다.

내가 힘들다며 도망친 세무 일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열심히 하고 싶다는 의욕은 앞섰지만, 나는 남자보다 힘이 부족했다.

결국 나는 다시 10년 넘게 해온 일을 붙잡았다.


지금 다니는 곳은 기장 건수가 많지 않다.

매달 들어오는 기장료가 내 월급보다 적지만, 세무사님은 양도·상속·고문 수입으로 운영을 이어간다.

이번 부가세 신고는 신입과 단둘이 60건 정도만 했다.

예전 100건 넘게 하던 때를 생각하면 여유롭다.


사실 이곳은 처음 면접에서 떨어졌던 곳이다.

실장은 보통 거래처를 가진 사람이 맡는다.

세무사님이 거래처가 있냐고 물으셨고, 없다고 답했지만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당연히 채용될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실장 경험 부족’이라는 불합격 문자였다.

그 후 취업 문은 더 좁아졌다.

그러다 종소세 시즌 직전, 세무사님이 다시 연락했다.

실장이 갑자기 나가고 거래처도 많이 빠져나갔다고 했다.

세무사님은 입사하여 일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종소세 신고를 해보고 결정한다고 했다. (마음속으론 하고 당장 정규직으로 입사하고 싶었지만, 조금 튕겼다.)


개업 3년 만에 실장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는 말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부가세 신고기간인데도 사무실은 조용했다. 낮에도 기장 업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실장이란 직함이 처음엔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알았다.

실력보다 중요한 건 ‘자리를 지키는 태도’라는 것을.

신고철에는 예민해져 다투기도 하지만,

기장 상담을 하면 계약이 의외로 쉽게 성사됐다.

보험 영업 시절엔 청약서에 사인을 받기 힘들었는데, 이곳에서는 기장계약서에 사인을 받는 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상담하러 오신 분인데 기장계약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세무사님께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기장 계약 잘하네~”라고 말해주셨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내 기대에 맞는 회사만 찾으려 했다.

일이 많으면 불만, 월급이 적으면 또 불만. 마치 내 기준에 딱 맞는 교집합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안다.

어디든 내 자리는 있다.

그 자리가 처음부터 내 자리가 아니어도, 내가 노력해 내 자리로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앉아 있을 수 있을 때— 그게 진짜 경력자의 모습이고, 전문가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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