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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아껴도 되는 이유

말은 나를 보호해 줄 상대 앞에서만 하기...

by 신수현

어릴 적부터 나는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그건 말을 ‘아낀다’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말이 서툴렀고, 나를 표현할 줄 몰랐다.

울면서 겨우 말을 꺼내곤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감추는 게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말을 안 해?”라고 물었다.

웃긴 건, 그들도 내가 던진 질문엔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일이 많았다는 거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말’은 나에게 큰 벽이 되었다.

말수는 적고, 발음은 부정확했고, 주장 하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내 목소리는 항상 웅얼거렸고, 뒤끝이 흐렸다.

그러니 당연히, 스스로도 내 말에 자신이 없었다.


영업을 준비하면서 내 말을 녹음해 봤다.

지점장은 “테이프가 늘어진 소리 같다”라고 했다.

나도 알았다. 말이 아니라, 숨소리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걸.


그때부터 보이스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스피치 학원을 몇 군데 다니면서 재미를 느꼈고, 목소리와 말하기에 대한 진단도 받았다.

의외로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재주도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내 말이 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어느 스피치 강사는 말했다.

“진짜 자유는 내면의 목소리를 말할 때 생긴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말을 안 한다고 자유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말한다고 다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그때부터 심리상담과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불안해졌다.

“내 마음도 다루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마음을 다룰까?”


어느 날 교수님께 물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마음이 더 무거워요. 괜히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은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래서 전,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 앞에서만 말해요.”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나는 웃으며 나의 차가운 이미지를 깨보려 했다.

스피치 할 땐 과거의 상처까지 꺼내 이야기했지만, 누군가는 피식 웃었고, 누군가는 귓속말을 나눴다.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돌아오는 길은 항상 더 무거웠다.


왜 그랬을까. 왜 굳이 내 이야기를 꺼냈을까.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마음이 풀릴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겐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오히려 말은 상처가 된다.


지금 내가 일하는 곳엔 나처럼 말수가 적은 직원이 있다.

우린 “왜 말이 없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게 편하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누가 내 이야기를 지켜줄까.

아직 찾는 중이다.

나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나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그게 ‘틈’이 된다.

보이지 않던 벽에 생긴 작은 틈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그러다 결국, 내 안이 다 들여다보인다.

왜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없을까.

왜 같은 실수로 자꾸 상처받을까.


이제야 알겠다.

나는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했고, 상대는 그걸 알아봤다.

내가 그 사람을 더 원하고, 기대고 있다는 걸.


그래서 쉽게 흔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또다시 ‘사람’이 아닌 ‘일’에 집중한다.

말로 다 풀 수 없는 감정은, 글로 풀어낸다.


처음엔 낙서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글들이 내 인생의 답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제, 말이 아닌 글로 나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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