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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리허설 없이 시작된다.

누간가의 결혼은 새로운 가족의 시작이다.

by 신수현

나는 큰오빠와 14살, 막내와는 17살 차이가 난다. 큰오빠가 결혼할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우리 가족에서 누군가 결혼하는 건 처음이었고, 새언니가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장남은 아버지 대신'이라는 말처럼, 나는 언니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오빠는 시골로 내려와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하며 서른을 앞두고 몇 번의 선을 본 끝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결심했다. 부모님은 그가 행복하다면 반대하지 않으셨고, 이모가 사주를 봐주며 결혼하면 안 된다며 반대했지만, 결국 결혼은 이루어졌다.

작은 키에 동그란 눈을 가진 새언니는 도시 출신은 아니었지만, 집안일에는 서툴러 보였다. 농사일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엄마도 작지만 생계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일하셨다. 하지만 큰오빠 부부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불안감이 들었다.

7남매는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며 자랐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금방 다시 가까워지곤 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은 달랐다. 새언니가 부모님을 모신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기대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일을 덜 하시고 편하게 지내시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상황은 달라졌다.

엄마의 일은 오히려 두 배로 늘어났다. 언니는 우리의 도시락을 간신히 싸는 정도였고, 그것도 엄마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제사준비로 바쁜 시기에도 화가 나면 손을 놓고, 그 일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되었다. 농사일은 물론 가사도 손을 대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모습이 서운했고, 언니가 엄마의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더하게 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형제들이 출가를 하여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엄마가 여행을 가시며 "아버지 식사만 챙겨줘"라고 하셨는데, 그 '식사만'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 처음 실감했다. 그래서 새언니가 부모님과 어린 시누이들과 지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에겐 서운함이 더 컸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나는 타지에서 사회생활 중이었다. 나도 함께 돌보고 싶다고 했지만, 둘째 언니는 단호히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자리에서 너만 잘 지내면 돼." 그 말은 내게 위로 같기도 하고, 벽 같기도 했다.


결혼 10년 만에 새언니는 분가를 했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셨다. 막내오빠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며 집으로 들어왔다. 나도 겨우 얻은 크고 조용한 방을 또 내줘야 했고, 결국 또 다른 가족이 생겼다.


처음엔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이 전부였다. 하지만 큰오빠가 결혼한 후에는 오빠와 아버지, 며느리와 아버지, 막내며느리와 아버지... 새로운 가족이 생길 때마다 갈등이 시작되었다.


가끔은 생각한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이 과연 가족의 의미일까?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 이야기를 꺼내신 적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걱정되어 이혼을 선택하지 않으셨지만, 그때 이혼이 이루어졌어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엄마는 혼자서도 누구보다 강하게 살아가실 수 있는 분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달리 사교성도 좋으시고, 활발하시며,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도 익숙하게 이어가시는 분이시다. 나도 엄마를 닮으면 좋으련만... 난 새로운 사람과의 사이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버지처럼...

사람들은 이혼가정의 아이들이 불행하다고들 하지만, 의외로 그들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상처를 주며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우리 가족에게 '처음'은 많았다. 형제들의 결혼도 처음이었고, 그래서 우리 가족과는 다른 성향의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것, 하해가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부모님은 우리와는 달리, 하고 싶은 말도, 훈계가 섞인 도움 되는 말도 눈치를 봐야 했을 것이며,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서 그런 불화살은 나에게 돌아왔다.


서로 상처를 주는 관계라면,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멀어진다고 해서 마음까지 멀어지는 건 아닌데, 어쩌다 한 번씩 명절이나 생일 같은 날 함께 모여 웃으며 지내는 것도 충분히 가족 아닐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의무처럼 모였던 자식들. 이제 아버지가 떠나시고 나니, 엄마의 집은 너무 조용하고 어둡다.

우리 가족도 모두가 처음이었다. 나도 새언니들이 처음이었고, 며느리들도, 시댁식구들이 처음이겠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서로 같은 시간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갈 시간을 앞두고 있다. 나 역시 그 시간을 맞이하고 있고, 엄마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까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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