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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약과 소비, 그 미묘한 경계

대출을 먼저 갚아야 하는 사람과 누리면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by 신수현

요즘 나는 적금을 들거나 연금으로 노후를 준비할 여유가 없다.

적금의 이율은 너무 낮고, 연금은 내가 얼마나 더 살지조차 알 수 없으니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오히려 지금 내게 더 시급한 것은 '저축'이 아니라 '대출 상환'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저축할 능력이 없다는 자책보다, 대출을 완전히 갚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갚은 돈은 대부분 채무조정을 통해서였고, 원금은 줄지 않은 채 매달 이자만 간신히 납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치 갚기 위해 숨을 쉬고 살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때때로 경제라는 것이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든다.


이혼숙려캠프나 이혼을 준비하는 부부들을 보면, 그들 대부분이 돈 문제로 갈라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더 크다.

한쪽은 아껴야 한다고 믿고, 다른 쪽은 벌어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간극은 사랑보다 더 깊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 문제는 우리 가족 안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절약을 통해 대출을 줄이려는 사람들, 보통 여성들이 이런 접근을 선호한다.

‘빨리 갚고, 덜 쓰자’는 것이다.


매달 나가는 대출 이자가 아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소비 앞에서 스스로를 설득한다.

“지금 이거 안 사면, 이자 한 달분은 줄일 수 있어.”

그렇게 절약은 어느새 삶의 방식이 된다.


물론 이 방식은 장점이 있다.

빠르게 대출을 줄일 수 있고, 심리적 부담도 덜 수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젊음’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지나간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문화생활, 여행, 가족 외식… 그런 작은 여유조차 줄이게 되면 삶은 쉽게 메말라간다.

가계부는 풍요로워질지 몰라도, 마음의 여백은 사라진다.

일하면서 갚으면 된다는 사람들, 반면 대부분 남성은 ‘일하고 있으니 쓰면서 갚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출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를 바꾸거나, 고가의 카메라를 사고, 취미생활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지출을 ‘투자’라고 생각하며,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라고 주장한다. 돈을 벌고 있으니 괜찮다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은 괜찮지만 내일은 어떨지 모른다는 것이다.

실직, 경기 침체, 건강 문제 등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을 때, 이들의 경제구조는 쉽게 무너진다.

소비가 곧 삶의 엔진이 되는 방식은 위기 앞에서 가장 취약하다.

가족 안의 경제철학, 나의 언니는 대출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10년간 모은 3천만 원으로 낡은 아파트 전세에 들어갔다.

월세 부담이 없으니 심리적으로 여유로울 거라 생각했지만, 독립 후 구직이 쉽지 않았다. 대학과 직장을 병행하려던 계획도 엇나갔다.

월세는 없지만 관리비, 차량 유지비, 등록금, 교육비는 끊임없이 나갔다.

결국 언니는 나에게 집을 줄여야 한다며 원룸으로 이사를 권했지만, 난 그 결정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보증금은 줄고, 매달 고정지출이 늘어나며 생존에 대한 압박감은 더욱 커졌다.

우리 가족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대출을 갚아주면 다시 대출을 만드는 오빠. 그의 행동을 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대출은 0이 되어도, 다시 늘어난다.” 대출은 숫자가 아니라 습관이고, 반복이다.


갚았다는 사실이 안심을 주는 동시에, 다시 빚을 질 수 있다는 착각도 만든다.

돈에 대한 감각은 습관이다.

1000만 원으로 살던 사람이 100만 원으로 줄이면, 처음엔 고통스럽지만 곧 익숙해진다. 반대로 100만 원으로 살던 사람이 1000만 원을 받게 되면, 900만 원을 저축하며 살 거라고 확신하지만, 어느새 1000만 원을 다 쓰게 된다.

사람은 풍요보다는 결핍에 더 빨리 적응한다. 익숙해짐은 참 무섭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적금이율보다 대출이율이 높다면, 적금보다 대출상환이 먼저다.

요즘처럼 취업도 불안하고, 고정수입이 없는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절약이냐 소비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떤 방식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절약은 삶의 기반을 다지지만, 소비는 삶의 활기를 만든다.

대출을 줄이는 삶은 안정감을 주지만, 소비로 얻는 즐거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절약하고 싶고, 누리고 싶다.

쓰고 싶고, 갚고 싶다.

어느 하나도 포기하기 어려운 이 욕망의 균형을 맞추며, 나는 오늘도 가계부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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