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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elboso Feb 18. 2021

[플랜트 산업 쉽게 접근하기] 석유 산업의 역사 -6

#6. 석유 패권의 횡포와 폐해 (3) - 중동의 비극

지난주, 드디어 이란이 민족주의 지도자인 모사데그의 활약으로 영국의 석유 자원 횡포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사데그는 석유 패권의 횡포로부터 이란을 지켜내는 데 실패합니다. 미국과 영국 석유 카르텔이 석유 기득권을 지켜서 세계를 통제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독한지, 그 의지를 실현시키는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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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재 실패


영국은 모사데그 정권의 석유 국유화를 무산시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날뛰는 반면에,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이란과 영국이 합의할 수만 있다면, 이란의 석유 국유화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동의 소련에 의한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 이란과 영국의 원만한 해결이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란에서 뽑아 먹던 자산을 잃는 건 영국의 사정일 뿐..)


여기서 칠자매가 다시 등장합니다. 미국 정부의 입장은 이들의 이권과는 전혀 맞지 않는 얘기였거든요.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인정하면, 스스로 석유를 생산하고, 이란의 입맛에 맞춘 가격을 책정하여 시장에 판매하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건, 카르텔 세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켜내려 했던 생산량과 가격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란의 석유 국유화 성공은 석유 카르텔의 독점체제가 파괴되는 것과 같습니다. 칠자매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처칠(왼쪽), 스탈린(오른쪽)과 대화 중인 William Averell Harriman


1951년 7월, 미국 정부가 대통령 특사로 이란에 파견한 윌리엄 에이브릴 해리먼(William Averell Harriman)은 모사데그를 만나 다음과 같이 설득합니다.

  ① 당신이 알지 못했던 석유 산업의 실체는 사실 칠자매로 알려진 석유 카르텔이고, 

  ② 세계 석유 산업은 그들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③ 석유 카르텔은 절대로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④ 따라서 석유 국유화는 필히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⑤ 이란 정부가 AIOC에서 가져가는 수익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자.


미국도 영국도 각자의 이익이 최우선이었고, 이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해리먼의 설득은 먹히지 않았고, 협상은 실패합니다.


실패의 그림자가 짙어진 이란의 석유 국유화


미국에서 온 특사와 협상을 거부한 모사데그는 1951년 9월, AIOC의 모든 영국인에 대해 15일 이내 퇴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영국은 군대를 동원해 이란의 해상을 봉쇄하고, 이란의 석유 수출을 금지시키며, 이란 경제의 숨구멍을 막았습니다. 당연히 석유 패권을 지키려는 칠자매는 금수조치에 참여했고, 미국 정부는 미국 내 중소 석유기업의 이란 석유 구매를 금지했습니다. 심지어 영국 해군은 예맨 근해에서 이탈리아가 구입한 이란 석유를 압수하기도 했습니다. (깡패. 힘이 명분이고 정의인 영국) 이란이 석유를 판매할 수 있는 방법은 완벽하게 차단되었습니다.


1951년 다시 총리가 된 Winston Churchill


게다가, AIOC를 국영화(1913년)하고 영국의 석유 패권 장악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처칠이 1951년 10월 영국의 총리로 복귀하면서 말로 좋게 끝날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석유 패권 장악이 본인의 핵심 업적이었던 처칠은 이란을 총칼과 군홧발로 뭉개서라도 이란의 석유를 다시 빼앗을 생각이었습니다. 처칠의 폭력적인 파병계획에 미국 정부는 다시 한번 반대하지만, 처칠은 “영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답례로 미국도 이란에 대한 군사 행동을 지원하라.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이란이 한국보다 중요하다”고 오히려 미국을 압박합니다. 


미국의 급격한 태세 전환과 실패로 끝난 모사데그의 애국심


1592년 7월, 이란의 석유 국유화, 그리고 모사데그 정권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아주 갑자기 변합니다. 이란과 영국의 상태가 변한 것도 아니고, 미국이 영국 처칠 총리의 말을 잘 듣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소련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1950년 말부터 시작한 군비증강이 확실한 성과를 보이며 천조국(국방비로 천 조를 쓰는 나라)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이 이때부터입니다. 국방력으로 소련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이상, 소련 눈치를 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모사데그 제거를 고려하기 시작한 미국은 소련과 전면전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1953년 1월, 모사데그 정권을 뒤집기 위한 비밀공작을 승인합니다. 비밀공작의 핵심은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가 함께 이란 내부 세력의 반란을 조장해서 모사데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593년 8월, 미국 CIA는 영국 MI6의 도움으로 모사데그 타격대를 조직하고, 미국과 영국의 사주를 받은 파즐롤라 자헤디(Fazlollah Zahedi, 처음에는 석유 국유화를 지지했지만 변심한 반역자, 이란의 나치 부역자, 이란의 반공 주의자)의 팔레비 왕(당시 이란의 국왕)을 내세운 쿠데타로 모하마드 모사데그는 정권을 잃고 구속되었습니다.


파즐롤라 자헤디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테헤란에서 행진 중인 시위대


이렇게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3년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모사데그의 석유 국유화를 통해 석유 카르텔의 세계 지배에 도전을 하면 어떤 결말을 보게 되는지, 석유 카르텔, 미국 정부, 영국 정부가 손에 쥔 석유 패권이 얼마나 막강한지 다시 깨닫게 되고, 석유 카르텔이 본인들의 기득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란의 석유 국유화로 더욱 강해진 석유 카르텔, 


도전자를 꺾은 챔피언의 명성이 더욱 두터워지는 것처럼, 자국의 자원을 지키려는 이란의 석유 패권에 대한 도전은, 이를 막아내고 수습한 석유 카르텔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봉쇄되었던 이란의 석유를 다시 시장에 내놓으려면, 칠자매가 금수 조치를 해제하고 이란의 석유를 다시 유통시키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칠자매는 이란 사태를 정리하는 대신 당시 석유 카르텔을 흔들던 독점 규제 등 모든 정부 규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고, (석유 산업의 역사-4 참고)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승인합니다.


이란의 자원을 석유 패권에 팔아먹고 영국의 귀빈이 된 팔라비 왕(가운데) 오른쪽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미국의 석유 카르텔은 사업적 성과도 거둡니다. 애초에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 영웅이었던 모사데그가 축출되었기 때문에 이란 국민의 반영 감정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고 AIOC가 예전처럼 이란의 석유를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란의 석유 사업 지분은 다음과 같이 쪼개집니다.

  ① AIOC (Anglo-Iranial Oil Co., 영국) 40%

  ② 로열 더치 셸 (Royal Dutch-Shell, 영국) 14%

  ③ CFP (Compagnie Française des Pétroles, 현재 TOTAL) 6%

  ④ 뉴저지 스탠다드 오일 (New Jersey Standard Oil., 미국) 8%

  ⑤ 소코니 (SOCoNY, 뉴욕 스탠다드 오일, 미국) 8%

  ⑥ SOCAL (Standard Oil of California, 미국) 8%

  ⑦ 걸프 오일 (Gulf Oil, 미국) 8%

  ⑧ 텍사코 (The Texas Co., 미국) 8%


손쉽게 다른 이의 손에 있던 것을 쟁취한 미국의 석유 카르텔은 전리품의 아주 일부만 떼어내서 반독점 세력의 목소리까지 막아버리는 간악한 행태를 보여줍니다. 8%씩 차지한 미국 기업들이 각각 1%씩 떼어서 미국의 9개 중소 석유기업에게 배분했거든요. 


결과적으로 영국은 이란의 석유 자원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잃었고, 미국은 이라크의 1/4, 사우디 전체, 이란의 40%까지 챙기면서 석유 패권의 맹주가 됩니다. 하지만 이란은 원유 수입의 50%만을 갖게 되면서, 자원 독립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이슬람 혁명


미국의 도움으로 모사데그를 축출하고 다시 이란의 권력을 쥐게 된 팔레비 왕조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는 대가로, 막대한 석유 수익을 왕의 측근들이 독식하고 국민들에게는 독재 탄압정치를 시전 합니다. 해외 자본세력의 거대 유통망을 들여오면서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민들의 바자(bazar, 우리가 바자회라고 할 때 그 바자)를 몰락, 파산시키고,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풀어서 국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했습니다. 


1979.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의 사진을 들고 있는 시위대


특히, 근대화를 명목으로 내세워서 이슬람 전통을 붕괴시켰기 때문에 이슬람 종교 세력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란 내 이슬람 종교 세력이 머리가 되어 바자의 상인층, 학생, 그리고 이슬람 좌익세력 등이 결집하여 팔레비 왕조를 붕괴시키고 이란에 새로운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게 됩니다. 팔레비 왕조가 극단적인 친미였다면, 이슬람 혁명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정권은 초극단적인 반미였습니다. 


중동의 현대사가 전쟁으로 쓰여진 이유는 석유 패권을 지키기 위한 미국의 중동 내정간섭 때문입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영향으로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에서 미국은 이란의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라크를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지원 대가는 이라크의 석유 산업. 

하지만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이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고, 미국은 쿠웨이트를 이용해서 이라크의 석유 산업을 방해합니다. 

1990년 8월, 그래서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점령하게 되고, 

1991년 2월, 이는 걸프전쟁(1차 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그 뒤로 이라크는 이란, 북한과 함께 ‘악의 축’ 낙인이 찍혀서 2차 이라크 전쟁(2003년 3월, 사실상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까지 이어집니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은 미국이 중심이 된 석유 패권 세력의 탐욕이었습니다. 모사데그의 자원 국유화 운동을 인정해줬다면, 양보를 통해 서로 합의했다면, 지금 세계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미국과 이란의 대립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란을 비롯한 중동을 자신의 세력 안에 두려던 미국의 비밀공작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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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1918년) 미국이 내세웠던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침략 세력의 지배를 받던 많은 약소국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19년 3.1 운동)


하지만 미국과 석유 카르텔은 민족자결주의와 정반대의 행동으로 세계를 기만했습니다. 자국의 자원을 지키려는 약소국들의 노력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무력화시키고,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 기득권 석유 세력의 이익만 추구했습니다. 석유를 지배해서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미국의 입장에서 약소국의 생존 문제는 고민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의 착취와 간섭으로부터 스스로 생존을 쟁취해야 했던 이란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겹쳐 보여서 많이 공감되었던 것 같습니다. 패권 세력에게 당하기만 했던 이야기로 석유 산업의 역사 시리즈를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다음 주에는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 패권에 대한 반격, 1차 석유파동으로 이어지는 OPEC의 설립과 또 다른 패권주의에 관련한 이야기를 전달드리면서 시리즈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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