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석유 패권의 횡포와 폐해 (2) - 이란의 석유 산업 국유화
911 테러가 발생하고 1년 뒤인 2002년 미국은 이라크와 북한을 포함해서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합니다. 당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유는 “이란의 일부 세력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란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혹은 보유하기 위해 애쓰고) 악의 축이 된 배경에는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된 1908년부터 이어지는 억울한 역사와 석유 패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물론, 국제법상 금지된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가 옳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이번 주부터 2주 동안, 왜 이란이 악의 축이 되었는지, 그들이 왜 기어코 미국에 맞서면서 세계의 도움이나 동정, 연민도 받지 못하는 악역이 되었는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이야기의 끝에 어떤 생각을 하시게 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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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서막, 이란의 자원 민족주의가 등장한 배경
1901년, 이란 정부로부터 “60년 석유 개발권”을 따낸 영국 광산업자 윌리엄 녹스 (William Knox D'Arcy)는 1908년 이란 남부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하고 1909년 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APOC, Anglo-Persian Oil Company, 현재는 BP)를 설립합니다. APOC는 영국 석유 사업의 시점이 되는데, 군사적 목적 등의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1913년 영국 정부가 51%의 주식을 인수하면서 영국 정부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908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으니,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먼저 석유에 눈을 뜬 나라입니다. 하지만, 석유를 생산하여 얻은 대부분의 수익은 영국의 몫이었습니다. 이란 정부가 석유의 가치를 미처 모르고 “60년 개발권”을 헐값에 넘기면서 약속받은 이익은 겨우 수익의 16%인데, 이마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AIOC(APOC, 페르시아가 이란으로 바뀌면서 AIOC, Anglo-Iranian Oil Company로 사명 변경)의 이사회에는 이란 정부의 누구도 참여할 수 없었고, AIOC는 경영 상황을 이란 정부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48년, AIOC는 3억 2천만 달러의 수익을 얻고 영국 정부에 낸 세금만 1803만 파운드였는데, 이란에 로열티로 준 금액은 고작 917만 파운드였다고 합니다)
이란의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란이 정당한 배분을 요구할 때면, “모든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겠다”며 폭력적인 위협으로 불만과 항의를 잠재웠습니다. 게다가, AIOC의 영국인 직원들은 초호화 주택에서 겁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반면, 이란인 노동자들은 물도 전기도 없는 집단 주거 시설의 극악한 환경에서 고통스럽게 버티면서도 고작 하루 50센트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착취는 섬나라 종특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영국에 대한 이란인의 감정이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제적인 움직임 – 자원 민족주의
영국을 비롯한 석유 패권의 이런 행태는 이란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결국 석유 패권의 횡포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1938년 멕시코가 메이저 석유 회사를 비롯한 석유 패권의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한 석유산업 국유화를 성공시켰습니다. 이어서, 칠자매 중 하나인 뉴저지 스탠다드 오일의 지배를 받던 베네수엘라의 석유 산업도 국가의 소유로 만들기 위한 거센 움직임 뒤에 1943년 원유 수익의 50:50 배분에 합의합니다.
중남미의 이런 움직임은 중동의 산유국에도 전달되었지만,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와 같은 영국과 프랑스의 땅따먹기(사이크스-피코 협정, 석유 산업의 역사 #2 석유 패권 시대의 시작 참고)에 의해 만들어진 작은 나라들은 영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석유 패권의 착취를 피할 수 없었고, 미국에 석유를 바치는 대가로 안보를 보장받던(?) 사우디도 당시에는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1950년, 사우디도 당시 아람코를 운영하던 미국의 빅 5와 50:50 배분에 합의합니다)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이 산유국 정부와 50:50 배분에 합의할 수 있었던 건, 미국에 납부하던 법인세를 베네수엘라나 사우디에 납부하여 석유 수익의 배분 구조를 변경하는 것을 미국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란의 석유 산업을 지배하던 영국 정부는 석유에 외화 수입을 상당히 의존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처럼 통 크게 양보하는 ‘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영국 정부의 착취에 시달리던 이란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저항이 필요했습니다.
이란, 영웅의 등장 –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
이란의 저항은 민족주의 지도자인 모하마드 모사데그에 의해 실행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란은 중립국을 선언했지만, 영국은 이란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이란 남부를 불법 점령했습니다. (소련이 이란 북부 점령) 이때부터 모사데그의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 1882 ~ 1967)는 귀족 출신으로 스위스 로잔 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란의 재정위원회 위원, 하원의원, 재무차관, 회계검사원 원장, 법무장관, 파르스 주지사, 재무장관, 아제르바이잔 주지사, 외무장관 등을 역임한 이란의 정치가이자 민족주의 지도자로 석유 국유화와 근대화 등을 이끈 인물입니다.
모사데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국왕의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주의 정권을 세우려 했던 민주주의자, 혹은 근대화를 추진하던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한 독재자, 완고한 기회주의자 혹은 이란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란 사람들에게는 이슬람 민족주의 지도자로 많은 지지를 받았고, 패권국가인 미국과 영국의 ‘대이란 봉쇄정책’과 같은 엄청난 압박에도 당당히 “NO!”라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였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1944년 12월, 모사데그가 이끄는 이란 의회는 영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석유 협상은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법을 개정하고 이란을 불법 점령한 영국 및 소련의 군대가 이란에서 철수하기 전까지는 의회를 열지 않겠다며 자진 해산했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후, 1947년 12월 이란 의회는 영국과의 불평등 조약인 “60년 석유 개발권” 관련 계약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하고, 이란 정부는 AIOC와 협상을 통해 1949년 4월 로열티를 아주 조금 상향 지급하는 조건으로 보충조약(Supplement Agreement)을 체결했습니다.
만약 이때, 체결된 보충조약이 제대로 이행되었다면, 60년 후 이란이 ‘악의 축’으로 찍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보충조약을 체결한 영국 정부는 아주 간사하게 같은 해 9월 파운드화를 평가절하(대외적 통화가치를 하락시켜서 수입품의 가격을 증가시키는 대신 수출품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가 있습니다)시켜서 보충조약으로 조금 올린 로열티를 다시 떨어트렸습니다. 이란 정부는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하여 뚝 떨어진 로열티를 보전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영국 정부가 거절합니다.
영국의 간사한 계책에 농락당했다고 판단한 모사데그는 석유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총선에서 승리합니다.
이란의 석유자원 국유화
총선에서 승리한 모사데그에 의해 AIOC(영국 이란 석유회사, Anglo-Iranian Oil Company)가 국유화된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1950년 6월, 모사데그 의회에 석유 국유화 제안, 영국의 공작으로 친영파 알리 라즈마라 총리 취임
② 1950년 7월, 친영파 라즈마라 총리, 국유화 반대의사 표명
③ 1950년 12월, 모사데그, 의회 석유위원회 위원장 취임. 영국이 50:50 배분을 제안하지만 거절.
④ 1951년 3월, 모사데그의 이슬람 세력, 친영파 라즈마라 총리 암살
⑤ 1951년 4월 28일, 이란 의회, 석유 자원 국유화 단행. 모사데그 총리 취임.
이렇게 이란의 자원 민족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란 국민들에게 이 날은 반 세기 동안의 영국의 착취로부터 벗어난, 마치 우리의 광복절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이란이 막무가내로 영국의 자산(석유는 이란의 것이지만, 정유 공장은 영국 정부의 소유)을 탈취한 것도 아닙니다. 이란은 국유화법(이란 영토 내의 어느 회사든 국유화할 수 있는 법적 권리)에 따라 영국에 정당한 보상을 하고, 국유화 이전에 영국이 가져간 양과 같은 양의 석유를 계속 영국 정부에 공급하겠다고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AIOC에 재직 중인 영국인들의 고용도 유지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란 정부의 지극히 합리적인 보상책에도, 속이 뒤집어진 영국 정부는 모사데그 정부의 석유 국유화를 비난했습니다. 이란의 석유 국유화에 의해 외화 수입에 빨간 불이 들어온 영국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세계 최대의 유전 및 이란 아바단 (Abadan)에 위치한 세계 최대 정유 공장의 국유화를 막아야 했거든요. 하지만, 당시 영국 정부도 석탄 사업과 철강사업을 국유화했기 때문에 석유를 국유화해서 이란의 국민을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모사데그한테 겨가 묻었다고 비난하기에는 똥 묻은 영국 정부의 명분이 매우 빈약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냉전과 열전 사이
석유 패권을 잃을 위기에 처한 영국은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무산시키기 위해 1951년 6월, 영국 전함을 이란의 해안선에 등장시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아바단 (Abadan) 정유공장을 탈취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미국에 의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성명을 통해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반대하고, 미국 석유 기업의 이란 석유 구매 금지. 미국인의 이란 정부 협조 금지 등 이란이 석유 산업을 운영할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하면서 이란의 석유 국유화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했지만, 영국의 모든 군사적 행동에도 아주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영국의 군사 행동에 반대한 이유는 이란과 소련 사이의 우호조약(외국 군이 이란을 침략할 경우 소련군이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다는 조약입니다)에 의해 영국의 군사적 행동이 소련의 군대를 이란으로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산유국인 이란이 석유 패권을 위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들이 버티고 있는 서유럽을 소련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동, 특히 이란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소련이 남하하면 미국으로서는 전쟁 외에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 전력으로는 소련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두 지역으로 나누는 것도 부담스럽고,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의 군비 증강을 1950년 12월에 시작해서 1952년 말에 완료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당시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Omar Nelson Bradley)는 1952년 중반까지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과 영국은 석유 패권을 지키기 위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소련과 냉전(Cold War) 중인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겠다(Hot War)는 영국을 막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이란과 영국을 중재하여 “대화로 해결”을 시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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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졌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란 자원 민족주의의 결말과, 석유 패권이 중동에 가져온 영향을 전달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