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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Answer Jan 08. 2021

40살. 함박눈 맞으며 미친 듯 달려야 할 때

철들면서도 철없이 살자!

엊그제 저녁이었다. 내일부터 날씨가 추워진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싶었다.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계단에서 잠깐 망설였지만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입구로 내려왔는데, 이웃 주민의 옷에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설마’했었다. 그런데 ‘역시’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다시 망설였다. 그래도 항상 달리던 동네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리로 걸으면서 ‘나이 40에 무슨 청승인가?’ 싶었다. 그렇다. 나는 올해로 불혹에 접어들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뜻이고 사회인으로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무려 2번의 강산이 변할 정도였다는 의미다. 아저씨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게 된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동네 아저씨가 눈 내리는 날에 왠 달리기인지. 혈기왕성해 보이지도 않은 사람이 무슨. 눈을 맞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젖었다.



운동장에 도착한 후 약간의 체조를 하고서는 스톱워치에 ‘시작’ 버튼을 눌렀다. 처음 500m는 웜업으로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그 와중에 눈은 함박눈으로 변하여 더 많이, 더 빠르게 운동장에 쌓여가고 있었다. ‘라테’가 생각났다. 눈이라면 정말 좋았던 어릴 적이 떠올랐다. 강아지 마냥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좋아서 친구들이랑 골목길에서 눈싸움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남자라면 피할 수 없었던 군 생활 시절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끊임없이 쓸어대던 그때도 생각났다. 그 덕분에 예전처럼 눈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이제 달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오늘의 선곡은 분위기 있는 플레이리스트였다. 이름하여 ‘느낌 있는 음악’이란 제목으로 모아둔 노래를 들었다. 평소에는 ‘달리기를 할 때 즐겨 듣는 노래’인 제법 빠른 비트의 음악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느린 템포로도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온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하염없이 내릴 것만 같은 함박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달리는 것이 겉보기엔 사연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제법 로맨틱해 보였다. 귓가의 음악소리를 틈을 비집고 임팩트 있는 들려오는 ‘뿌뜨뜩뿌뜨뜩’ 눈 밟는 소리가 제법 운치 있었다. 40대가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이 이 소리를 들어봤겠는가. 그래도 최근 들었던 눈 밟는 소리 중 가장 우아하고 근사한 소리였다. 인공미가 전혀 없는 자연의 소리라는 것이 좋았다.



3km를 달렸을까. 눈은 더욱 로맨틱하지 않을 정도로 흠뻑 내리고 있었다. 칼바람을 동반한 날씨 탓에 특정 구간에 접어들면 눈은 일종의 무기가 되어 나의 안면을 강타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달리기 속도는 줄어들게 되었고 고개는 바닥을 향했다. 새하얀 도화지처럼 운동장은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의 발자국만이 그 백지 위에 점을 찍듯 계속 그려지고 있었다. 내 몸은 모든 점들을 이어주는 선분인 셈이었다. 내가 어떻게 달렸는지 보여주는 증거여서 그 경로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 밟고 지났던 공간만 꾸준히 찍어댔다. 생각 없이 달렸던 전과 달리 행여나 나의 흔적이 흐트러질까 싶어 신경을 쓰면서 달리니까 힘도 덜 들었다.



1시간의 목표량을 채운 후 살짝 망설였지만 이내 용기를 내서 운동장 가운데로 향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그곳에 누워보고 싶었다.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그래도 누워버렸다. 잠깐 동안이지만 누운 채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늘을 쳐다보니까 좋았다. 언제 이랬었나 싶어서 더욱 좋았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게 쉽지 않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이런 사소한 용기조차 내기 어려웠다. 귀찮음은 덤이었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나이 40에 이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스스로가 대견했다.



항간에 여자는 30, 남자는 40이 될 때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서른 살이 될 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때 처음 직업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부푼 꿈을 꾸면서 30대를 시작했었던 것 같다. 10년이 흐른 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지금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글이나 영상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것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뒤쳐진다는 느낌이랄까. 사실 엘리트 스포츠의 삶을 그만둔 후부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와의 비교가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를 지난 세월 동안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친구가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만 보이게 되면 이 같은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를 알기에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대학 동기와 선배들이 먼저 합격했던 임용시험 때도 큰 스트레스 없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후에도 뭐든지 도전할 때 자신의 만족이 가장 큰 동력이었다. 여행작가와 브런치 작가의 도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시도했었고 몇 번의 탈락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시 보완해서 도전하면 되니까.

나이 40살이 되니까 이 시간이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두리번거리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비교를 하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난 내 삶의 방식을 고수할 생각이다. 변화는 있어야 하지만 줏대 없이 하고 싶지 않다. 중심을 잡되 변화의 흐름을 읽고 나름의 방식대로 40대를 맞이하고 싶다. 유행에 휩쓸려 공허한 삶을 살고 싶지 않기에 뒤쳐진다는 생각은 개나 줘버려야겠다.



눈을 흠뻑 맞으며 달리면서 떠오른 것이 하나 있다.


철들면서도 철없이 살자!
인생을 살면서 체득한 경험을 무기 삼아 앞으로도 철없이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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