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도슨트 임리나 Dec 25. 2023

아버지 유언을 개판으로 지키다

인생이 개판이 됐다 5


아버지의 죽음을 겪기 전까지는 죽음에 임박해 멋있게 '한마디' 하는 것쯤은 웬만해선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마치 아이가 태어날 때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바로 아주 깔끔한 모습으로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영화를 보면 '갓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한 달쯤 된 아이 같은데...'라고 자신 있게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죽기 전에 식구들을 불러 모아 한마디를 할 수 있다는 건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천운의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의 상태는 물론이고 환경, 타이밍까지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도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언어를 잃으셨고 통증으로 몸부림을 치다가 진통제를 맞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견디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버지의 유언'으로 기억하는 말이 있다. 꼭 마지막에 멋있게 남긴 말만 유언이 아니라 그저 인생의 마지막에 자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유언이라고 나 나름대로 범위를 넓게 해석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의식이 있을 때 나에게 한 말이었고 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 먼저 떠올린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돌이 막 지난 손녀와 놀아주다가

삼사 년 후에 아들 하나 더....

라고 나에게 넌지시 말했었다.

그때 나는 딸을 키우느라 너무 힘들어서 둘째 생각은 전혀 없었고 아버지의 그 말에 오히려 반감이 들어


"아빠가 키울 것도 아니면서..."


라고 쌀쌀맞게 응수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말이 아버지 발인을 마치고 돌아온 버스에서 생각이 났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아이패드를 쓰셨으며 일본 순례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정모도 나갔던 분이었다. 그 카페장이 나와 비슷한 연배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다가 친해진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자식뻘 나이의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고, 정년 퇴임 후 10년이 지났지만 병문안이나 문상을 오는 분들이 평교사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교장 선생님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지지와 응원은 했지만 꼭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유학, 취업. 이혼, 재혼, 입양 내 인생의 고비마다 그저 아버지는 따뜻한 침묵만 지키실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보수적으로 보이는(꼰대 발언으로 보이는) 둘째를 얘기했다는 것이 의외였다.


남의 일에 간섭이 심하다는 한국인의 삼대 질문은 아마도 '결혼하셨나요?', '아이는?', '둘째는?'일 것이다.

그런 삼대 질문을 누구에게도 안 할 성격의 소유자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둘째 얘기를 했다는 자체가 놀라웠지만 그 이유를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물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콕 찍어 아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마 하나 더 '입양'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입양은 성별의 선택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 그러니 아버지가 나에게 둘째를 권한 것인지 아들을 권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솔직히 아버지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진심이 아니다.

다만 내 여건이 둘째는 언감생심이었다. 체력과 경제력도 무리라 생각했고, 입양 조건도 첫째 이후로 시간이 지났으니 나이도 제한이 걸렸다. 이럴 때  '내 팔자는 딸 하나인가 보다.'라고 신세한탄하듯 아버지의 유언을 못 지키는 것을 합리화하는 방법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4학년이 되고는 부쩍 동생 타령을 시작했다. 동생이 생기면 뭐든 것을 양보하겠으며 자신이 잘 돌보겠으니 동생 좀 어떻게 안 되겠냐고. 어디서 들었는지 보육원에 동생을 데리러 가자고도 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자고 졸랐다.

동생은 해줄 수 없어도 강아지나 고양이는 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으로 기울었다.

그렇게 아이는 누나가 되었고, 나는 둘째 같지 않은 둘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다소 엉뚱하게 지키게 된 셈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당연히 귀여워하셨을 거다. 그리고 딸과 놀아줬던 것처럼 강아지와도 잘 놀아주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을 개판으로 지킨 딸을 여전히 침묵의 지지로 따뜻하게 바라봐 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 남동생 삼 남매를 두셨고, 어느 자식 하나 치우치지 않도록 살펴 주셨다  둘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강아지를 키우게 됐지만 아버지가 자식 하나 더 바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자식이 하나인 나보다 더 즐거움이 많았고, 자식으로 인한 기쁨을 나에게 더 누려보기를 기대한 것은 아닐까  

아이를 키운다는 게 힘들다고만 생각하던 그 시절 아버지가 해주고 싶었던 말은 자식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었는데 내 쌀쌀맞은 반응에 늘 그렇듯 침묵하셨고, 나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있다  







대학원 졸업식날, 엄마는 안 오셨지만 아버지는 오셨다. 한 손에 아이패드를 들고서





이전 04화 개팔자가 상팔자라면 나도 상팔자 되어보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