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 택배기사예요?

2020 팬데믹의 서막 - 13

by 그저남기는자

- 팬데믹의 숨은 주역, 당시 민방위팀장님을 만나다


A: 과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실 물품 담당자로 일할 때 과장님이 “격리봉투 2만 장, 소독제 20박스 급해요!”라며 다급하게 전화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B: 그랬죠. 초창기에는 위생 키트에 뭘 넣어야 할지도 모를 때였잖아요. 보건소에서 물건을 사주면 우리 직원들이 강당에 모여서 일일이 다시 포장했어요. 가방이나 박스에 담아 운반하기 좋게 패키지를 만드는 거죠. 직원들뿐만 아니라 사회복무요원, 여성예비군들까지 붙어서 새벽부터 밤까지 24시간 공장을 돌렸습니다. 정말 컨베이어 벨트만 없었지 '물류센터' 그 자체였어요.


A: 포장도 고됐지만, 배부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으셨죠?

B: 사람이 하는 일이라 참 미안한 게 많았어요. 격리자가 폭증할 땐 전 직원이 배달에 투입됐는데, 본연의 업무가 있는 직원들에겐 내부 불만도 있었죠. 그래도 14일간 갇혀서 물건만 기다리는 시민들을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었어요. 주말에는 직원들 차마 못 시키고 저랑 팀장이 직접 배달 나갔습니다. “물건 안 온다”, “샜다”, “왜 누구는 주고 나는 안 주냐”... 욕도 참 많이 먹었지만, 그분들 답답한 마음 이해하니까 최대한 빨리 교환해 드리고 뛰어다녔죠.

자가격리 물품 배송 후 인증샷

A: 과장님 체구에 그 무거운 박스들을 옮기느라 정말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B: (웃음) 한 번은 택배기사로 오해받은 적도 있어요. 우체국 박스를 잔뜩 싣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끌개로 내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시민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우체국 집배원도 여자가 있어요?” 순간 당황해서 아니라고 답은 했지만, 제 차림새가 영락없는 택배기사였나 봐요. 특히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5층까지 박스 서너 개를 이고 올라갈 땐, 한겨울에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던 기억이 나네요.


A: 보건소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으니 안전도시과의 지원이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B: 그때는 ‘재난’ 상황이었잖아요. 다 같이 하는 게 당연했죠. 보건소 인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으니까요. 2022년 초 재택치료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을 땐 설 연휴도 반납하고 전 직원이 엄동설한에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나중엔 퀵 업체와 계약하면서 숨통이 좀 트였지만요.


A: 제가 구청 마당에서 과장님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기사님들 지휘하시는 걸 봤거든요. 기사님이 “대구에서 저렇게 일 잘하는 공무원 처음 봤다”며 감탄하시더라고요.

B: 아이고, 별말씀을요. 개인정보가 민감한 시기라 배달 시 주의사항을 좀 강하게 당부드렸던 것뿐이에요. 기사님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잘 따라주셨고, 우리 일을 많이 덜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죠.


A: 이제는 그 치열했던 시간도 조금씩 잊히고 있는 것 같아요.

B: 아득한 옛일 같지만, 저는 여전히 기억해요. 보건소 직원들, 우리 구청 직원들 모두가 자기 일처럼 나섰기에 이만큼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건넌 이름 모를 강

팬데믹이라는 해일이 덮쳤을 때, 우리는 각자 선 자리가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방역의 최전선에서, 누군가는 행정의 뒷선에서 저마다의 파도를 견뎠습니다.

평소라면 마주할 일 없던 낯선 업무들—행정직 공무원이 택배기사가 되어 계단을 오르고, 보건소 직원이 밤새 물류를 분류하던 그 밤들. 그것은 직업적 소명을 넘어, 옆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온기였습니다.


재난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발견했습니다. 부서의 벽을 허물고 오직 '안전'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지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나누었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땀방울 섞인 눈인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건너온 것은 전염병의 시간만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기댔던 '연대의 기억'이었습니다. 그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어떤 파도가 다시 찾아온대도 기꺼이 서로의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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