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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Dec 20. 2019

[제멋대로 영화보기 #2] 미안해요, 리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들

 2006년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2016년에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평생 한 번도 받기 어려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이 돌아왔다. 그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커다란 주제를 담고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묵직한 이야기<나,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소외된 서민층의 적나라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개봉한 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후자의 주제를 담고 있다. 켄 로치 영화들을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보통은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에서 그랬듯 힘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소외된 계층을 매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품어주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이번 영화는 전작보다 더 어둡고 슬픈 현실을 조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영화 곳곳엔 켄 로치 특유의 뭉클한 따뜻함이 산재되어 있다.


 이번에 그의 관심은 새로운 노동계층으로 향했다. 바로 택배기사(우리나라로 치면 대한통운보단 비정규직 쿠팡맨에 가깝다)와 간병인이다. 이들은 어떤 회사에 직접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고 법적으론 자영업자로 구분된다. 하지만 회사의 통제 안에 갇혀 있고 업무시간과 휴가를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일을 하다 문제가 생기면 회사는 전혀 모르는 일이고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즉 일은 직장인처럼 죽어라 하는데 모든 리스크는 자영업자처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공 '리키'는 모종의 이유로 기존 회사를 관두고 택배기사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며 새 도전에 나선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근무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고 일 자체도 고되다.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직이다 보니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난다. 때문에 육체적 고단함과 더불어 감정 소모도 무지하게 일어난다. 

 아내 '애비'는 간병인이다. 그녀는 자기가 담당하는 모든 환자들을 엄마처럼 여기며 최선을 다해 모신다. 기업으로 치면 이달의 우수사원은 거뜬히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하지만 간병인 사회에서 그녀는 추가 근무 수당도 제대로 못 받고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하는 천사 같은 호구에 가깝다.

 리키와 애비에겐 두 명의 자녀가 있다. 한 명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듯 반항하고 사회에 불만도 많은 아들 '셉'이다. 그는 학교에 가서 수업 잘 듣는 모범생이 되는 것보다 공공시설에 그라피티를 그리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알고 보면 마음도 여리고 주관도 뚜렷한 아이지만, 부모님의 상황을 이해하고 좀 더 큰 그림을 보는 데엔 많이 서툴다. 그래서인지 표면상 가족의 가장 큰 문제아처럼 드러나고 실제로 영화 속에서 수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또 한 명은 막내딸 '리사'다. 영특한 머리를 지녔고 주변 환경에 매우 민감한 아이이다. 부모님과 오빠의 갈등에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많이 하며 그와 연계된 집안의 고민들로 밤에 잠도 잘 못 자는 아이다. 귀엽고 밝은 아이지만 슬프게도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영화의 주인공 리키 가족!

 이 영화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상황이 가슴 깊게 와 닿았다.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도 복합적 성격의 캐릭터가 얽혀있다 보니 단순히 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리키는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들,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고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하려면 자신이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친 듯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셉과 리사는 아빠가 저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이유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일이 힘든 만큼 점점 더 다른 모습의 아빠가 되어 가는 걸 견딜 수 없어한다.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가족을 위해 하는 일 때문에 정작 가족을 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서로에게 끔찍한 말들을 하고 있고 또 같이 있는 시간이 적은 만큼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많다.

화목한 리키 가족의 모습

 이렇게 복합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저 배우들을 본 적이 있는가? '난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 아니라, 배우는 잘 모른다'며 낙심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들은 다 이번 영화로 처음 영화계에 데뷔한 배우들이다. 리키를 연기한 배우 같은 경우엔 실제로 20년 동안 보일러 수리공 일을 하며 리키와 유사한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어디서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켄 로치 감독이 왜 이들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리키 가족 그 자체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담이지만 리키와 애비의 연기는 훌륭했고 셉은 목소리 톤이 너무 멋있어서 왠지 다른 영화에서도 또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여운 리사는 분명 다른 감독들이 배역을 위해 탐내고 있을 것 같다. 

그라피티 중인 셉과 친구들

 영화의 핵심 갈등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부모 리키, 애비와 아들 셉의 갈등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땐 셉은 부모한테도 막말하고 나쁜 짓도 일삼는 집 안의 문젯거리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도 셉이 엇나갈 때면 주위 아주머니들이 '어휴 저 못난 놈'을 연발하며 큰 한숨을 내쉬셨다. 자, 그렇다면 정말 셉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고 영화 속에서 스쳐가듯이 언급된 것처럼 셉만 없으면 가족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셉이 부모의 마음도 모르고 철없이 행동한 건 맞다. 그리고 셉의 사회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셉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어쩌면 내가 부모세대보단 자녀세대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셉에게 더 감정이입을 했을 수도 있다.) 나는 셉 자체보단 부모 자녀 간에 제대로 된 소통이 없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안 좋게 나타난 결과만 보고 그 이면에 숨겨진 원인을 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리키와 애비는 셉이 무엇이 하고 싶으며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진정성 있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어떤 그라피티를 그리고 다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그저 가방 속에 나온 라카통만 보고 꾸짖을 뿐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대충 셉이 어떤 종류의 그라피티를 그리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림을 살펴보면 성난 표정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서로에게 겨누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말들이 격렬하게 오가고 있다. 나는 이것은 그동안 셉이 살면서 봐온 부모님의 모습이거나 자신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고 공격하고 꾸짖으려고 하는 리키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고 봤다. 분명하게 이건 관계에서 온 문제와 관련이 있는 그라피티이다.


 영화에선 부모와 자녀 세대의 갈등 말고도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갈등, 일하는 도중 생기는 각종 고객(환자)과의 갈등이 드러난다. 분명히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 것 같은 데 리스크를 개인이 지는 이상한 근무환경은 확실히 피고용인에게 불리하다. 영화다 보니 리키의 상황이 많이 부풀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들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법한 일들은 아니다. 충분히 현실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들을 위한 법적 보호망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라도 리키의 고용주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또한 시스템 속에 하나의 부품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그게 그가 좋은 사람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나쁘고 안 좋다면 대책이 필요한 것 아닐까?   

 고객 갈등이야 뻔한 이야기다. 속칭 진상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영화를 보면 세상에 저런 진상도 진상이 없다 생각이 들지만, 사실 우리는 그 진상 고객들의 세부적인 사정 역시 알지 못한다. 나중에 모든 사정을 알고 나면 그들도 또 다른 리키나 애비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 또한 때로는 진상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도 내가 시킨 택배가 안전하게 잘 도착하는지만 신경을 쓰지 그걸 가져다주는 아저씨가 무슨 사정이 있고 무슨 상황인지는 솔직히 알바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선 고생하시는 아저씨께 요구르트나 주스 하나라도 드리는 사람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한국에선 <미안해요 리키>로 번역되었다. 나쁘지 않은 번역이지만 확실히 원제가 주는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한다. 'Sorry We Missed You'라는 말은 영국에서 택배기사가 고객에게 직접 물건을 전달해주지 못했을 때 남기는 쪽지에 쓰여있던 머리말이다. 직역하자면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 정도가 될 것 같다. 

 영화 속에선 리키가 고객들에게 죄송함을 전했지만 사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놓친 고객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러 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빚만 늘어나고 길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다른 켄 로치의 영화에 비해 더 우울하게 느껴졌던 건 이러한 현실 때문이었다. 놓치고 있는 게 분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 

 그렇다면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은 뭘까? 나 또한 어떤 일에 몰두해 다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와 리키의 인생 모두 볕 들 날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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