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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몬순 Aug 29. 2020

고양이와 폼롤러

고양이는 가끔 좋은 핑계가 되어주기도 한다

폼롤러라는 물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우선 나의 종아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7년 이상을 서서 하는 일만 하다 보니 종아리가 굵고 단단해지고 늘 아팠다. 계속 종아리 부종을 풀어주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하체 혈액순환에 도움을 준다는 센시○도 먹어보고, 스트레칭도 지속해 보고, 20만 원짜리 다리 마사지기도 구입해 보았으나 나의 악성 종아리는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종아리를 얇게 만드는 것은 포기하고, 통증을 완화하고자 마사지라도 꾸준히 해보자 싶었다. 그러나 20만 원짜리 공기압 마사지기는 나의 대단하신 종아리를 감당하기엔 압력이 터무니없이 약했다. 결국 녀석은 당○마켓을 통해 반값에 팔아버렸다.


요가링, 젠링이라고도 하는 운동용 소도구. 종아리에 끼우면 부종을 완화해 준다는 설이 있다.





폼롤러는 그때까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필라테스 소도구 수업을 잠깐 다녔을 때 다용도로 활용 가능하길래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구매했었지만, 집에서 혼자 하려니 영 가볍고 어정쩡한 기분이 들어서 한참 방치했던 그냥 스티로폼 기둥(?)에 불과했다. 우리 집 운동 도구가 언젠간 마주했을 운명의 수순을 자연스럽게 밟았던 것이다.






어느 날 그런 폼롤러를 구석에 한참 방치한 것이 신경 쓰여서, 폼롤러로 할 수 있는 운동과 스트레칭을 ○튜브에서 검색해 보았다. 이전에도 검색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자세가 불편하고 귀찮고 힘들어서(운동이 된다는 이만큼 확실한 증거도 없다) 몇 번 따라 하고 그만두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기대하진 않았다. 

그때 <200초 만에 하체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종아리의 무게로 오래 고통받아온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었다. 반신반의하며 동영상을 클릭했다. 동영상의 출연자는 7분여에 걸쳐 종아리를 얼마나 아프게 마사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계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와, 진짜 아프겠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종아리 부종을 오래 겪은 자들은 안다. 아픔의 강도는 시원함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이날, 나, 아니 나의 종아리는 폼롤러라는 존재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십수년 묵은 나의 악성 종아리가 광명을 찾는 순간이었다. 폼롤러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폼롤러는 애물단지에서 내 종아리의 구원물로 거듭나신 도구님이셨다.



언제 방치했냐는 듯, 폼롤러를 무안단물 급으로 신봉하게 된 자의 모습.



TV 보다가 생각나면 다리 좀 굴려주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가 스트레칭이 필요할 것 같을 때도 쓰고, 가끔 베개로도 사용하면(올바른 사용법이 아닙니다) 되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늘 눈에 닿는 곳에 있어야 좋을 것이다. 폼롤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가장 적당한 자리는 TV 옆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우리 집엔 고양이가 산다는 걸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언제인가 택배로 받은 스티로폼 박스가 순식간에 우수수 작살나는 동시에 그 조각들이 고양이의 입속으로 힑힑힑(고양이가 이상한 걸 삼킬 때 내는 소리) 흡수되는 걸 본 이후로 줄곧, 스티로폼은 우리 집에서 10분 이상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폼롤러는 스티로폼이 아닌 EPP라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쨌든 얼핏 보기엔 스티로폼과 비슷한 재질이다. 그래, 고양이의 발톱이 쉽게 파고들어 드륵드륵하며 긁은 뒤 순식간에 잔해를 주변에 파스스 흩뿌릴 것만 같은 그런 재질 말이다.

당연히 TV 옆에 둔 폼롤러는 순식간에 작살났다. 자고 일어나니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고양이라는 분들은 인간이 없을 때 꼭 일을 치시더라. 폼롤러는 널브러진 채 군데군데 생채기를 입은 상태였고, 깨알 같은 EPP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져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머릿속에 뻔히 그려졌다.



하지만 폼롤러의 목숨보다는 고양이들의 배 속으로 폼롤러의 조각들이 과연 몇 개나 들어갔을지가 더 걱정되었다. 다행히 고양이의 응가를 통해 그들이 무사히 대장까지 도달하여 배출되었다는 것은 이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고양이들도 큰 탈은 겪지 않았다.


그렇게 첫 번째 폼롤러를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다. 형태가 변형된 폼롤러는 사용하지 말라는 권고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사용하기는 곤란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폼롤러를 다시 구매했다. 다리 마사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 이번엔 보관에 심혈을 기울이기로 했다. 관리만 잘하면 이 구매는 잘못된 선택이 아니리라.

여기까지가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리 마사지 잘하고 있냐고?


폼롤러를 재구매한 뒤, 나는 장롱 위를 폼롤러의 보관 장소로 정했다. 장롱 위는 고양이들의 마수가 닿지 않는 유일한 장소다. 하지만 그 장소는 내 손이 잘 닿지 않는 영역이기도 했다. 158cm인 인간의 손이 장롱 위에 닿으려면 발판이 필요하다. 꺼낼 때마다 발판을 가져오는 것이 귀찮은 노동으로 느껴졌다. 꺼내기 어려우니 결국 자주 꺼내어 쓰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 꺼내서 쓴다 해도 고양이를 집중 마크하면서 이용해야 한다. 자주 꺼내서 쓰기엔 너무나도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경제적이고도 훌륭한 기능의 도구를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폼롤러를 버리는 순간, 나는 내 종아리를 관리할 수단을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생각에 감히 처분할 수가 없다. 나의 종아리에 대한 집착도 한 두 해의 일은 아닌 것이다. 건강이 신경 쓰이는 나이에 도달하니, 이 정도의 운동 도구는 집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한 켠에 있다.(이를 대신해서 전신 마사지기나 실내 자전거 같은 걸 집에 들여놓고 싶진 않았기에) 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은 애물단지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나는 몇 년째 장롱 위에 방치된 폼롤러를 매일 쳐다보며 이 스티로폼 기둥의 처분을 고민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박몬순이 이 물건을 잘 사용했을까?”하고 누군가 물어도 사실 자신 있게 대답할 자신은 없다.

본래 운동 도구 또는 운동 기구라는 것은 언젠가는 장식품이나 옷걸이 등으로 의태되어, 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서서히 본래의 용도가 잊혀지도록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자매품으로 요가매트가 있습니다








본문에 그려진 폼롤러 사용법은 만화적 재미를 위한 생략 및 과장이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올바른 폼롤러 사용법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권합니다.



고양이 참치와 살구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at_chamchi_sal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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