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 우리 아 죽십니더, 우리 아 좀 살려 주이소~”
어느 시골 정류장 평상위에 잠시 휴식을 위해 포대기 끈을 풀자 사지마비가 되어 버린 내 몸이 훌러덩 평상위로 내동댕이 처 버렸습니다. 이에 놀란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1977년 모내기가 한창이던 어느 봄 5살 어린 저는 사지마비가 되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이유도 없이 찾아온 근육 무기력증에 뇌만 살아 말만 야무지게 할 수 있는 손녀를 업고 전국 의료기술을 모두 찾아다녔습니다.
1남 5녀 중 4째로 태어나 ‘잘난 가시나’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던 손녀이지만 할머니는 온 가슴으로 저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고집도 세고 머리도 영리하고 의지도 강한 여장부였습니다. 시대적 환경으로 문자 공부를 많이 못했을 뿐이지 영민한 판단력과 추진력은 단연 최고이신 분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옛날에도 학문을 한 지식인이었고 동네 구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지만 경제적 활동 같은 생활력은 정말 부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늘 뽀얀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다니셨던 우리 할아버지의 인품은 너무도 따듯하고 고운 분이었습니다.
멀리 외출을 하고 돌아오실 때면 꼭 품안에서 보름달 빵과 박하사탕을 꺼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저 멀리 할아버지의 하얀 두루마기가 보이기 시작하면 행복한 설레임이 올라왔습니다.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아들 귀한 집안의 흔한 딸이었지만 누구보다 사랑 받으며 자랐습니다.
할머니가 마음먹고 하겠다하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할머니는 아픈 저를 치료하기 위해 안 해 본 방법이 없고 안 가본 장소가 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간 가래로 호흡이 힘들어지니 의사가 목에 구멍을 뚫어 관을 삽입하는 시술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할머니가 가만 보니 그런 환자치고 멀쩡하게 살아나가는 이가 없더랍니다.
“안 됩니더. 그러다 우리 아 죽입니더. 절대 안 됩니더”
할머니는 당장에 아버지를 호출하여 저를 퇴원처리 했고 그때 주변에서는 무식한 할머니라고 욕을 했지만 그 덕분에 저는 현재 외상 하나 없는 예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시 할머니의 판단이 정확했던 거지요.
아직도 조각 조각 기억이 납니다. 부산 영도의 오르막길을 무거운 저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던 할머니, 유난히도 달콤하고 말랑한 백도를 숟가락으로 잘라 제 입어 넣어주던 손길, 거칠 고도 따듯한 손으로 불쌍한 내 새끼~ 하며 쓰다듬어 주시던 눈빛
병원에 입원해 있던 저를 보기 위해 고성에서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오시던 아버지는 늘 밤 만주 양과를 사 오셨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아픈 것 보다 달콤하고 맛난 것을 먹는 행복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근을 위해 새벽녘 어둠이 여전한 시간에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시던 모습도 늘 잔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할머니와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전 그 시절이 고통스럽다 거나 아팠다는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불쌍한 내 새끼 살려보겠다고 노력하던 그분들의 사랑과 따듯함만이 한가득 제 세포에 남아 다소 행복한 한 시절로 존재합니다.
그렇게 큰 정성으로 저는 어디에서 회복했는지 모르게 7살 되던 그해 건강이 회복되었고 벽을 잡고 걷고 지팡이를 쥐고 걷다 총총총 뛰어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 감사한 할머니이니 방학이면 할머니랑 함께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늘 쌀뜨물을 받아 만든 달걀찜을 만들고 꼬들꼬들 생선을 구워 주셨습니다.
“할매~ 내가 나중에 돈 벌어서 좋은 거 많이 해 줄때까지 꼭 살아야 된다.”
“아쿠야, 그때까지 내가 살면 구신이 되것다.
이리 더러운 할매를 내 새끼가 아니면 누가 좋다고 해 주겠노~
예쁜 내 새끼~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그렇게 아픈 손가락이 된 저는 자라는 내내 부모님과 모든 친인척들의 사랑을 무한히 받았습니다. 초1 때 아버지가 사준 예쁜 드레스를 입은 신데렐라가 그려진 하드 커브 동화책은 제 독서력의 씨앗이 되었고, 핑크빛 플라스틱 소꿉놀이 세트는 시골 흙 마당의 깨진 사기그릇을 버리고 편안한 대청마루로 놀이터를 옮겨 주었습니다.
저는 유난히 웃음이 많고 눈물이 많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는 적극적인 사람이구요.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제 모습은 무한히 열린 가슴으로 저를 다 받아주던 우리 할머니 덕분입니다.
그 어린 시절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인정받던 경험과 무조건적 사랑은 단단한 무의식적 자존감의 뿌리를 만들어 주었던 겁니다. 평생의 끔찍한 장애조차 인생의 행운으로 만드는 놀라운 기적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유년 시절은 신이 고통으로 포장해서 보낸 선물로 풍요로운 행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