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러하듯 초등학교 시절 제 꿈은 자연스레 선생님 이였습니다. 좀 더 어릴 때는 판사, 대통령이 나오기도 했지만 메타인지가 형성되는 고학년이 되자 어린나이에도 현실감이 찾아들며 도달 가능한 범위를 선택 했던 겁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대한 개인적 의미나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그 시절 저에게 가장 큰 영향자 중의 한분이 학교선생님이었습니다. 그 꿈은 잔잔한 호수같이 흐르는 저의 삶과 함께하여 실제 대학교도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해야 하는 대학졸업 시기가 되자 저의 꿈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중등임용 고시를 2번이나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한 겁니다. 이전까지 어떠한 작은 실패도 경험하지 못했던 온실 속 화초인 저는 자존감은 바닥을 헤메고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구석진 방안에 혼자 누워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있자니 살아가는 의미도 사라졌습니다. 때마침 대학교 2학년부터 사귄 오빠야 집에서 결혼을 하라는 독촉을 했습니다. 답답함과 회피의 마음을 안고 저는 25살 12월 아주 어린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지금 남편이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라 다행이지 보통은 그렇게 진행된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나는 스토리가 많습니다. 하마터면 눈앞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더 큰 어려움으로 걸어가는 형태가 될 뻔 했습니다.
그렇게 26살, 27살, 28살 저는 자연스레 주부생활에 적응하여 동네아줌마들과 모여 칼국수도 나눠먹고 생활비 절약을 위해 보일러 사용시간을 줄이기도 하며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28살 딸이 태어났습니다. 잔잔한 물속에 침전되어 있던 진흙처럼 잠들어 있던 성장욕구가 삶의 소나기에 맞추어 격하기 뒤집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라는 역할, 아내라는 역할 그리고 또 나! 다양한 감정들에 휩쓸려 우울증과 삶의 흥분에너지가 충돌되어 몸과 마음이 어찔했습니다.
남편은 경찰공무원입니다. 객관적으로 안정적인 직장이라 기본적인 생활고는 없습니다. 다만 딱 그기까지 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없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남편이 사라지면 그야말로 불쌍한 저소득층 아줌마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 시절 추석명절이 다가오는 어느 날 이었습니다.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어보니 통장아주머니가 분리수거 이익금으로 산 쓰레기봉투 10L 한 묶음과 설탕 1킬로를 주셨습니다.
살다 누군가가 주는 공짜를 얻었다는 마음에 그날 저는 하루 종일 참 행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소박하기도 하지만 한편 아련하기도 합니다. 집에 주부로 있어 보면 먹는 식사도 담백해집니다. 김치와 국물하나 정도가 보통이고 부지런하면 달걀프라이를 함께 먹게 됩니다.
남편은 늘 그랬습니다.
“밥 잘 챙겨먹어. 대충먹지 말고”
도대체 뭘 잘 먹으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저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엄마가 없어도 밥 잘 먹어. 대충 먹으면 안 돼”
어느 날 아줌마들이랑 커피를 마시다 제가 그랬습니다.
“언니들 우리 아파트 호수로 부르지 말고 이름 부르면 안돼요? 제 이름이 있는데 매번 811호 하니까 조금 슬퍼요.”
그날부터 아줌마들이 저를 “영희씨~”라고 호칭해 주었습니다.
딸이 태어나고 시작은 경제적 이유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직업이 선택 가능했지만 최종적으로 저는 교육행정직 시험을 치게 되었고 제 평생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시험자격에 나이제한이 있어 제 나이가 마지막 컷 이었습니다. 그러니 동기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언니, 누나였습니다. 초반에는 뒤쳐진다는 마음에 직장에서 늘 바빴고 빨리 승진이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보면 참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여하튼 저는 꿈이라서가 아니라 삶의 현실적 이유로 현재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자라면서 배운 대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연히 중간 중간 피를 말리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자기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돈 벌기가 어디 쉬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올해로 21년 차입니다. 그중 11년은 막말로 죽지 못해 다녔습니다. 공무원이라는 상징성과 급여가 주는 달콤함을 위로삼아 한 시간, 하루, 일 년을 보내고 인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사하게도 어중간한 시간은 개선이 어렵다 여겼는지 삶이 저를 완전히 바닥으로 밀어 내렸습니다.’
‘죽지 않으면 살아야 하고 살려면 제대로 살아야 한다.’
삶을 대하는 자세도 바꾸고 끌려가는 삶에서 내가 이끌고 가는 삶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러자 직장에서 매번 나를 숨 막히게 하던 존재들이 정말 신기하게 영화의 엔딩장면처럼 가루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느 날 출근하는 아침 엘리베이트에서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는 저에게 한분이 말했습니다.
“영희 씨는 아직도 웃고 다니나? 살만한가 보네? 내가 언제까지 그리 웃는지 볼끼다”
“어머, 과장님, 언제까지라뇨? 저는 끝까지 웃을 건데요!”
저마다의 스트레스로 찌푸려진 인상이 상식이 된 직원들 사이로 어디 하나 모자란 사람처럼 늘 웃고 있으니 농담으로 한 표현입니다. 사실 그렇게 애태우고 뒤늦게 가진 직업이니 저는 늘 감사합니다.
물론 성향이 감성이 풍부하여 냉정한 행정에서 실수를 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적극적 성격과 태생적 노력이 보완되어 그럭저럭 제 자리를 잘 잡아왔습니다. 아주 과거 손금을 좀 본다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영희 씨는 아주 돌아 돌아 자기 직업을 찾아 가겠네” 이제 보니 돌아온 저의 길은 지금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우리에게 직업이란 경제적인 부분과 별개로 나라는 사람을 독립하게 하는 힘이 있고 삶의 열정을 한번은 만나게 하는 기회입니다. 어떤 직업이어야 행복하다 하는 건 있을 수 없고 다만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뿐입니다. 오늘 현재 내가 속한 이 직장에서 나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어쩜 하나의 기적입니다.
저는 30대부터 재테크에 관심이 아주 많았는데 수많은 지식들을 접하고 내린 결론은 건강과 꾸준한 직장생활이 최고의 재테크라는 겁니다.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사람은 예외이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직장만큼 뛰어난 수익률을 낼 수 없습니다. 매년 100% 몇 천 만원씩 실패 없이 수익을 올린다는 건 신적인 존재입니다. 실제 회장님을 가르치는 사업가 ‘돈의속성, 김승호 회장’도 안정적인 작은 돈은 불규칙한 큰 돈 보다 그 힘이 훨씬 강하다 했습니다.
제게 인생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그 행복에 직업도 하나의 수단으로 들어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하던 이 순간 그것이 나의 운명이고 내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문득 어느 교리에 있다는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할 수 없는 일은 빨리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그 일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