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은 안 먹어도 빵은 하루에 한 번은 꼭 먹어야 한다는 20대 민폐 제빵왕이었다. 어쩌다 한번 머핀을 구우면 냄새라도 좋지, 매일 머핀을 구워대는 턱에 집안은 종일 버터 냄새가 났다. 오븐을 한번 쓰면 최소 2시간은 사용을 했고, 주방은 전세를 낸 듯 2~3시간을 쓰던 그녀였다. 설거지는 제때 하지 않고 싱크대에 늦게까지 처박아 두었고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시끄럽게 달그닥 그렸다. 한마디로 하우스 메이트가 거지 같다는 말이다.
워킹홀리데이로 살아가다 보면 원치 않은 사람과 한집에서 또는 한방에서 살게 된다.
좋은 룸메이트를 만난다는 건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바뀌는 룸메이트와 이사로 인해 바뀌는 하우스 메이트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내가 만났던 희한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한 집에 살면서 교성을 지르던 발정 난 커플, 똥 싸놓고 이틀간 물을 안 내리던 미친놈, 쓰레기 봉지를 반려식물 키우듯 한방에서 지내던 여자, 침대 밑에 라면 냄비를 1달 넘개 방치해둔 푸른곰팡이 같던 놈까지도.
나는 기억한다. 그 놈들을.
좋은 놈
워홀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룸메이트 중에 좋은 놈은 딱 2명이었다. 그중에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은 '멍지'라는 동생은 맹한 얼굴에 순한 아이였다. 깐 달걀처럼 뽀얀 피부에 화장을 하면 청순한 소녀로 변신을 했는데 평소엔 얼굴을 막 쓰고 다녔다. 얼마나 막 쓰고 다녔는지 이른 아침 트램에서 아르바이트 가던 도중에 잠이 들었는데 인스펙터가 홈리스인 줄 알고 내리라고 했다고 한다. 멍지는 홈리스 아니라고 설명을 했다. 믿지 않던 인스펙터에게 브런치 레스토랑의 그리스 사장과 통화를 시켜주고 난 후에야 풀려났다고 했다. 그날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그러게 이쁜 얼굴을 왜 막써?
그렇게 함부로 쓸 거면 나나 줘"
"아침 일찍 나가는데 화장하기 귀찮아~ㅎㅎ"
쓰리잡으로 밤낮 일을 하던 때가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보면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나를 위해 삼계탕을 끓여 놓았다며 뜨끈한 국에 야들야들한 닭살을 떠서 얼른 먹으라며 건네주던 아이.
멜버른의 편의점엔 삼각 김밥이 없어서 아쉽다던 나의 말을 기억하곤 삼각김밥 틀을 어디서 샀는지 구해와서는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싸 주던 아이였다.
알바 가서 대충 빵으로 때우지 말고 밥 챙겨 먹으라며 삼각김밥 2~3개씩 싸서 나에게 건네주곤 했었다.
그럴 땐 코끝이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고마워서. 마음이 예뻐서.
어느 날엔 새벽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가는데 거실에서 추운지 함 꺼 움츠린 채 자고 있던 멍지 였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방에 들어와서 자지"
"어제 술 많이 먹고 와서 언니한테 술냄새 날까 봐~ 헤헤"
배려심까지도 가득한 아이였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는 룸메이트 유형이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딸아이의 엄마가 된 멍지이지만 난 여전히 내 룸메이트였던 청순한 소녀를 이따금씩 생각하곤 한다. 1년 가까이 함께한 착한 멍지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인연이 이어져 가고 있다.
이상한 놈
이제 이상한 놈 차례이다.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룸메이트, 하우스 메이트들이 많았다. 먼저 베이커리 전도사가 되어 맨날 빵만 굽던 제빵왕 김탁구 놈은 커플이었는데 민폐 끝판왕이었다. 함께 살고 있는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이 저녁 식사를 할 수 없게 주방을 점령했다. 머핀을 구우면 예의상이라도 조금 나누어 주련만 커플은 오롯이 본인들 입에만 넣었다.
한 번은 하도 춥다 춥다 하길래 내 옥장판을 인류애로 빌려 주었다. 동갑내기 친구가 멜버른을 떠나면서 나에게 선물로 주고 간 귀한 옥장판이었다. 나라면 고마워서라도 구운 머핀을 하나쯤은 주었을 텐데 절대 주지 않았다.매일 머핀을 굽는 이들의 루틴 중엔 아파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일과가 있었는데 매일같이 세탁기를 돌렸다.
하루는 '누가 맨날 세탁기를 이렇게 돌리지?' 싶어서 안을 들여다보니, 세탁기 속 내용물은 커플들의 수영복과 수건 2장이 달랑이었다. 세탁이 끝나도 세탁물을 몇 시간이고 제때 꺼내지 않아 매번 세탁기를 쓰려던 다음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소음은 둘째치고 이 커플들이 셰어 하우스에 들어온 이후 수도세와 전기세가 두배 이상 나왔고 n분의 1로 돈을 내는 부분이라 참다못해 커플에게 말을 했다. 하우스 메이트들 대신해서 내가 총대를 메었다.
"그 정도 소량이면 세탁기 돌리는 것보다는 샤워할 때 손세탁하는 거 어때요? 매일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 세탁기 돌려요. 오븐은 전기세도 많이 나오기도 하고, 수도세와 마찬가지로 n분의 1로 내잖아요. 여기 오븐 쓰는 사람 탁구네 말곤 아무도 없어요. 베이커리 도구들도 제때 치우지 않으셔서 다른 사람들이 주방 쓰기 불편한 것도 있고요. 싱크대도 매일 기름 범벅이고 한 달 내내 버터 냄새나는 것도 그렇고요. 오븐과 세탁기 매일 쓰시는 건 자제 부탁드릴게요."
떨떠름하게 "아.. 네" 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커플은 몇 달 후 이사를 갔는데 낮에는 팽팽 놀다가 밤만 되면 복수라도 하듯이 시끄럽게 박스테이프 쫙쫙 뜯어가며 짐을 쌌다. 그 망할 놈의 베이커리 도구들을 깡깡 부딪혀 가면서. 이 정도면 작정하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새벽 2시가 넘어가자 정말 화가 났지만 내일이면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 꾹 참았다. 다음날 커플은 방안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하우스 메이트들에게 말 한마디 인사조차 없이 떠났고, 오븐은 기름때가 가득했으며, 내 옥장판 전기선은 선명하게 가위로 자르고 튀었다. 정말 대단한 인성이었다. 내가 만난 이상한 놈들 중에 당연 TOP급이었다.
이밖에도 쓰레기를 방안에 모아 두고 버리지 않는 이상한 연 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피자를 자주 사 왔는데 버려지는 피자 박스는 없었다. 요리를 해 먹지 않는 그녀였지만 매일 포장을 해서 방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날 때 쯔음 집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났다. 분명 저 일본인 여자 방인데.. 심증이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였다.
어느 날 그녀가 랭귀지 스쿨로 나가는 걸 확인하고 그녀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오 마이 갓!! 그녀의 화장대 옆에는 검은색, 흰색 봉지 4개, 그동안 먹은 피자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서 다행이었지만 경악했다. 아니 왜? 일본인들 다 깨끗한 거 아니었어??
그날 저녁 그녀에게 두 달에 한번 있는 바닥 카펫 스팀 청소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열었다가 쓰레기를 보았다며 당장 치워 달라고 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마야, 쓰레기를 왜 모아 둔 거야?"
"아노... 쓰레기를 어디에 버리는 줄 몰라서... 고멘 나사이"
쓰레기 버리는 곳을 물어보기 쑥스러워 쓰레기를 본인 방에다가 한 달 반을 모아 온 마야... 오 마이 갓이었다. 진짜.
괴상한 놈
내가 만난 괴상한 놈들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두 놈이 있다. 한 놈은 라면 먹은 냄비를 침대 밑에 한 달 넘게 방치해 두고 집세를 내지 않은 채 푸른곰팡이만 남겨두고 홀연히 야반도주를 한 놈. 그리고 욕실에 똥 싸놓고 이틀간 물을 내리지 않는 놈이었다.
먼저 푸른곰팡이 놈. 한국에서 워홀로 온지는 1년이 다 되어간다는 28살 청년 푸른곰팡이는 한 달 후 멜버른을 떠나 퍼스에 있는 농장으로 간다고 했다. 세컨드 비자를 받기 위해서 수박 농장으로 갈 거라며, 농부의 신이 되어 돈을 모은 다음에 시드니로 갈 거라고 했다.
처음 푸른곰팡이를 보았을 때 온몸이 수두에 걸린 것처럼 징그러웠다. 어디서 물렸는지 베드 버그에 물려서는 룸메이트에게 까지 옮겨서는 격리되어 있다가 온 집을 탈탈 소독하고 나서야 그 곰팡이 놈을 처음 만났었다. 베드 버그는 사람 피를 빨아먹는 빈대인데 한번 물리면 물린 자국이 징그럽게 부풀어 올랐다. 한동안 나는 푸른곰팡이 놈을 피해 다녔다. 혹시 모를 빈대가 나에게도 옮겨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은 착했다. 그런데 어딘가 늘 싸한 느낌은 있는 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며칠이 지나도 집에 안 들어온다는 푸른곰팡이의 룸메이트의 말을 들은 마스터는 곰팡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받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곰팡이의 룸메이트가 외박을 했던 밤이었을 것이다. 이놈이 언제 들어왔었는지 곰팡이의 짐이 싹 비워졌다. 한 달간 집세를 내지 않은 채 튄 것이다.
열받은 마스터는 그놈을 찾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을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일주일이 더 지난 후 방을 청소하던 마스터는 큰소리로 분노하며 쌍욕을 해댔다. 침대 아래에서 썩어가던 라면 냄비를 발견한 것이다. 마스터는 함께 살고 있던 룸메이트에게 몰랐냐며 냄새 안 났냐고 물어보니 그는 다행스럽게도 극심한 비염에 후각을 거의 잃은 상태라고 했다. 와우.
이밖에도 똥을 싸놓고 치우지 않던 미친 연 날리는 커플이 있었다. 투룸에 욕실 하나, 화장실 하나인 집에 살 때였는데 나와 룸메이트는 화장실을 쓰고, 커플은 욕실 화장실의 변기를 쓰기러 사전에 합의를 했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샤워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이것은 필시 똥냄새였다.
변기 뚜껑은 굳게 닫혀 있었고 공포스러웠지만 나는 뚜껑을 열었고 기겁을 하고는 뚜껑을 던지듯이 닫았다. 왓 더 뽝! 확실히 똥이었다. 나는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욕실을 나왔다. 대충 화장실에서 손발을 씻었다. 너무 기가 찼지만 피곤에 쪄들어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 씻으려고 욕실을 갔는데 냄새는 더 지독했다. 룸메이트도 보았다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커플은 치우지 않았다.
나중에 참다못해 대화를 시도했는데, 커플 중 누구도 욕실에 똥을 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욕실 화장실을 누가 썼다는 거예요? 여긴 4명밖에 살고 있지 않잖아요. 저와 룸메이트는 오래전부터 욕실 화장실을 쓰지 않고 생활했어요. 그쪽들 이사 오시전부터요. 화장실 청소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희 욕실을 써야 하는데 지금 못쓰고 있어요. 오늘 중으로 청소 부탁드릴게요"
분명 그저께 술을 진탕 먹고 들어온 커플이었다. 둘 중 한 명이 싸고 물을 안 내려놓고 서로 안 쌌다고 이틀간 물을 안 내리다니 참 대단했다. 그리고 커플은 가끔 밤마다 참을 수 없었는지 교성을 지르기도 했다.
함께 사는 집인데 참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잠깐.
그럼 이틀간 저 커플들은 용변 해결을 어떻게 한 걸까?
욕실 바닥에? 아니면 우리가 쓰는 화장실에?
멜버른에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 이상한 놈들과 괴상한 놈들은 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