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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까자까 Dec 05. 2022

맨날 술이야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맨날 술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쭉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로움에 한껏 취해 밤이면 밤마다 술잔을 부딪혔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같은 워홀 친구들과 한인 술집으로, 밤늦게 까지 문을 연 펍으로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셨다.


대부분의 호주 식당들은 밤 10시면 문을 닫았지만 한인 술집은 늦게까지 장사를 하는 곳이 있었다. 어떤 한인 술집은 문은 잠그고 간판 불은 끄고, 뒷문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몰래몰래 손님을 받았다.

그냥 일반 술집이었지만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불법적으로라도 술을 마시려는 의지의 사람들.

참 술 좋아하는 한국인 들이다.

소주 한 병에 4천 원, 청하는 5천 원이었다. 지금은 가격은 모르지만 2008년에 저 가격이었다. 소주를 못하시는 나는 청하를 마셨는데 남들보다 천 원 더 내고 마셔야 했다.


그곳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재미있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재미있었고 워홀이라는 신분이 같아서 그런지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다. 영어가 잘 안는다는 변명과 호주에서 오지잡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 함께 살고 있는 거지 같은 하우스 메이트들과의 흉 등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았다. 각자 일하고 있는 곳에서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한인잡에서 일하는 워킹홀리데이들이 더 많았는데, 워홀러들 사이에서 사장이 한국인이면 한인잡, 호주 사장이면 오지잡 (AUSSIE JOB)이라고 불렀다.


"야야~ 나는 말이야~"

새벽에 축구 경기장 청소를 한다는 친구는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50불을 주웠다는 땡잡은 이야기.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닦는 친구는 손이 퉁퉁 불어서 주부 습진이 걸렸다는 이야기.

한인 고깃집에서 일하면서 숯돌이랑 공조해서 손님들의 남은 생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

사장이 베트남 사람인데 한국 사장보다 더 지독한 악덕에 알고 보니 베트남 갱스터라는 이야기까지도.

참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며 서로 누가 더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고생 배틀을 토해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 친구들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워홀을 1년 더 연장할 것인지, 1년 후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네들은 앞으로의 계획이 뭐야?"

열심히 돈을 모아서 여행을 갈 계획이 있는 친구.

워홀 1년이 거의 끝나가서 수박 농장으로 세컨드 비자를 따러 갈 예정인 친구.

영어를 1년 안에 마스터해서 한국에 있는 외국계열 회사에 취직할 거라는 친구.

미래는 없이 오늘만 사는 맨날 술이야 한량 친구까지.


대부분 계획은 거창했고, 실행은 미약했다.

그저 매일 밤 함께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술잔을 부딪히며 신세 한탄을 하거나 헬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과 지금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나마 영어를 1년 안에 마스터한다는 친구는 제법 체계적인 계획이 있었고 현재 실행 중인 상태였다. 나중에 몇 년이 지나고 전해 들은 소식으로는 목표대로 외국계열 회사에 취업을 했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런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지 6개월이 되었고 멜버른에 온 지 9개월쯤 되었다.

나는 점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게 안에서의 영어 소통은 이제 어려움이 없었다. 아마도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인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며 밤마다 술을 마셨다. 고깃집 밖에서의 나의 영어는 여전히 짧았다.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며 당장 무엇도 실행하지 않았다. 점점 타성에 젖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맨날 만나는 똑같은 사람들.

맨날 듣는 비슷한 이야기.

실행 없는 허세 가득한 계획과 하우스 메이트 욕.

나의 뇌와 귀는 점점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의 알람이 들렸다.

"삐빅 빅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맨날 술만 퍼먹고 살려고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거야?'

목적을 잃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끼리끼리' 삶에 안도했다.

그 무리 속에서 편안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생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화로구이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인데, 멜버른 대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친구들 만남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달랐다. 워홀러들 사이에서의 대화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지금 대학에서 과제가 어떻고, 방학 때 무엇을 할 예정이며,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호주에 남아 영주권을 받을 건지 고민하는 내용이었다. 대부분은 계획과 목표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레었다. 눈빛을 반짝거리며 그들의 대화를 열심히 들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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