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풀코스 행군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No No! 일요일은 다 함께 시장 보러 가는 날.
끔찍하고 비효율적인 장보기 원정대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100년 된 아파트를 떠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었다. 야라강 건너편의 사우스뱅크 아파트. 그때 아파트 청소를 하려고 갔던 그 동네이다. 멜버른 워홀러들 사이에선 '싸뱅'이라 불렀다. 함께 살던 하우스 메이트 언니들은 워홀 연장을 위해 농장으로 떠났고 나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새로운 동거가 시작되었다.
싸뱅 아파트엔 6명이 살고 있었는데 일인당 10불씩 걷어서 식비를 아껴보자던 H언니의 제안이 있었다. 가난한 워홀러들은 늘 돈을 아껴 써야 했으므로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스터와 거실 셰어 한 명을 제외하고 하우스메이트 4명은 그렇게 장보기 원정대가 되었다.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혼자 장을 보면 버리는 식자재도 많았고 한국 양념이나 반찬은 비싸서 사 먹을 엄두를 못 내었는데 함께 돈을 모아서 장을 보니 비싼 반찬들도 살 수 있었다. 요리와 뒷정리는 돌아가면서 했다.
3주일이 지나가니 서서히 부작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일요일에 늦잠을 자고 싶어 했고, 외식으로 함께 밥을 못 먹는 사람도 생겼고, 또 누군가는 전날 늦게까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장보는 날 비몽사몽 했다. 그러나 장보기 원정대의 출발 시간은 짤 없이 일요일 오전 11시. 불참 시 벌금 10불이었다. 그 10불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행군을 시작했다.
1. 사우스 뱅크에서 트램을 타고 플린더스 역 하차
2. 플린더스 역에서 환승
3. 퀸 빅토리아 마켓 도착: 야채, 과일, 생선, 고기 구매
4. 한인 마트로 이동: 한국 양념 및 재료 구매
5. 걸어서 근처 대형 마트 들름: 식자재 구매
6. 다시 플린더스 역: 또 다른 한인마트에서 최종 물품 구입
7. 걸어서 사우스뱅크 집으로 귀가: 정리 후 녹초
나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이 행군은 총 4명의 전우와 1인당 기본 가방은 3~4개로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약 3~4시간의 장보기 풀코스인 것이다. 왕복 거리 6.8km+@
전날 친구들과 술을 거하게 마신 나는 숙취가 올라와 죽을 맛이었다. 고기를 사러 빅토리아 마켓의 미트 마트에 들어갔을 때 비릿한 생고기 냄새를 맡는 순간 지옥을 맛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한인 마트 코스에서 한국 만두를 사자고했다. 다들 머뭇 거리다 결국 사지 않았다. 공금으로 장을 보다 보니 내가 먹고 싶은걸 못 산다는 또 다른 단점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 유일하게 갖는 나의 힐링타임은 바삭하게 구운 고향만두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이었다. 결국 사비를 털어 고향 만두 1팩을 사고야 말았다.
야참이 생각 이난 그날 밤.
나는 만두가 먹고 싶어졌다. 거실엔 룸메이트 H언니와 C언니가 TV를 보고 있었다.
"만두 구울 건데 먹을래?"
"아니, 괜찮아. 네 개인 돈으로 샀잖아. 너 먹어~"
둘은 거절했다. 나는 신나게 만두를 구웠다. 주방엔 만두 굽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둘은 힐끔힐끔 주방 쪽으로 이따금씩 고개를 돌렸다. 6개를 굽고 나서 접시에 올리면서 예의상 한번 더 물어봤다.
"만두 먹을래?"
둘은 서로의 얼굴을 한번 보고 내 얼굴을 쓱 보더니 미소 지었다. 결국 셋이서 사이좋게 2개씩 먹고, 냉동실에서 만두를 꺼내 더 구워 먹었다.
"아.. 밤에 괜히 먹었어. 살찌는데.."
"맞아. 만두 때문에 괜히 맥주까지 먹었네"
C언니가 말하고 H언니가 거들었다.
나는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쩨쩨하게 만두 몇 개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장을 보러 갈 때 만두를 사자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했고, 내가 개인 돈으로 사면 그들은 신나게 쩝쩝거리며 야금야금 먹고 난 후 불평을 했다. 야밤에 괜히 먹었다며.
나는 더 이상 장보기 원정대의 멤버이고 싶지 않았다.
장 보는데 3~4시간을 허비하는 시간도 아까웠고, 무거운 감자와 양파를 어깨에 짊어지고 행군하는 것도 정말 고달팠다. 그냥 구황작물을 포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먹는 양에 비해 들이는 시간, 에너지, 불합리가 더 많은 이 짓거리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내 고향만두를 아무렇게 않게 먹고 불평하는 저 얄미운 주둥아리들이 꼴 보기 싫었다. 아르바이트 핑계로 탈퇴를 선언하고 식사 시간이 겹치지 않는 시간대에 나는 혼자 밥을 먹었다.
나중에 거실 셰어 하는 분과 우연히 식사 시간이 겹쳐서 밥을 함께 먹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하우스 메이트들의 성향을 파악하곤 장보기 원정대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선구안에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어느 날 H언니는 깨소금 사는 돈이 아깝다며 사지 않았는데, 요리하다 필요하면 몰래 마스터의 깨소금을 썼다.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그녀는 '조금인데 뭐 어때?' 라며 남의 재료에 손을 댔다. 다른 동네에 살고 있는 워홀 동생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어떤 셰어 하우스에선 계란을 몰래 쓰다 걸린 워홀들이 멱살잡이 하며 싸움이 났다는 그런 흉측한 스토리였다.
그날 이후 나는 나의 식자재에 눈금을 그려 놓았다.
H언니가 몰래 쓸 수 없도록.